내가 만나고 싶었던 진짜 바다
한국인들의 가장 큰 욕망을 한 단어로 표기하면 <아파트> 일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내 주변 모든 이들도 나 역시도 그 욕망을 자연스럽게 욕망했다. 타인의 욕망을 더욱 욕망하듯 나이를 한 살 한 살 어른이라고 불리는 나이의 가까워질수록 <아파트>를 원했다. 특히 내가 원했던 아파트의 이름은 <서해 그랑블루>였다. 나는 비록 원룸에 살더라고 이 집을 만약 산다면 몇 년 후 나는 더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고 주변의 부끄러움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욕망’의 휩싸였다. 안타깝게도 나의 <아파트>의 대한 욕망을 실현되지 못하였고 <영화 만들기>에 대한 욕망이 나를 뒤덮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만들기>에 대한 욕망은 실현되었고 뒷맛은 씁쓸하지만 뭐 그러려니 하며 다음 욕망을 기다라며 이전처럼 욕망 몬스터가 될 준비 하는 중이다.
그런 나에게 최근 이상한 딜레마가 생기게 되었다. 진짜 내 욕망은 무엇인지, 오롯이 올곧게 스스로의 욕망을 바라볼 수는 있는지, 그 욕망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사람으로 되는지. 뭐가 더 나은 욕망인지를 말하기 앞서, 인간에게는 어떤 욕망을 추앙하는가에 따라 그 인간의 ‘결’과 ‘선’이 이루어지는가 를 최근의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정답도 내리지 못한 채 나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영화 방송 일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케이팝 일을 하게 되었고, 삼고초려 끝에 영진위에서 다음 다큐 영화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되었고, 와이프는 임신을 하고 출산을 준비하게 되었다. 많은 변화 속에서 나 스스로의 욕망을 마주할 틈 없는 빠른 변화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보다 일상은 바쁘지는 않다. 빠른 변화 속에 놓여 있지만 그렇다고 사실 바쁘지는 않다? 글의 모순이 있지만 정말 그렇다. 오히려 이전보다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뚜렷해져서 꽤나 명료한 삶을 살고 있다. 욕심에 가까운 욕망이 있고 그걸 어떻게 해버리고 싶어서 안달 난 시절보다 오히려 꽤나 명쾌하다. 매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이보다 더욱 건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난 건강하다. 동시에 이렇게 건강한 만큼 <아파트>를 욕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불안>하다. 불안의 휩쌓여서 어떻게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지는 않다. 나의 ‘불안’과 ‘결핍’이 내 욕망을 전부 대변해 주는 시기는 이제는 끝난 것 같다.
우연히 ‘노아’군이 태어나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중, 만약 <서해 그랑블루>를 살았더라면 ‘노아’군을 만났을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단코 난 <아파트>를 욕망했으면 이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인연에는 그 인연의 걸맞은 때가 있다. 난 지금 내 아들 노아군과 적절한 때에 만난 것일까? 수수께끼의 멋지게 대답을 하고 싶은데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난 아빠가 처음이고 이 녀석도 내 아들로서 태어난 지 3일밖에 안되었으니 말이다.
문득 <그랑블루>의 진짜 뜻이 궁금해졌다. <그랑블루>는 아파트 이름이 아닌 <깊고 푸른 바다>를 뜻하는 멋진 프랑스어이다. 우연인지 우리 아들 이름은 <노아의 방주>의 그 ‘노아’이다. 희망의 빛이라는 한자어와 기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된 김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노아’라는 이름의 걸맞게 깊고 푸른 세상이라는 <그랑블루>를 무사히 헤쳐 나가는 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바다는 <그랑블루>라는 ‘아파트’가 아닌 <그랑블루>를 헤쳐 나가는 ‘노아’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