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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면지언니 Sep 14. 2022

여름, 거리예술의 계절

유럽의 도시에서 만난 거리예술 (월간 국립극장 2022.8월 기고)

여름을 떠올려 보자. 나무 그늘 아래가 소중해지는 시기, 휴가를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 길어진 해와 함께 하루가 길어진 것 같은 마음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문득 유럽의 어느 도시로 떠나 보자. 거리예술의 동향을 살펴보며 잠시 유럽의 곳곳을 여행해 보자.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남짓 왔을까, 여느 관광지와는 조금 다른 소도시에 도착했다. 거리예술 축제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방문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이곳은 사람들이 잘 아는 도시는 아니다. 온 도시가 축제로 휩싸여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기차역 주변은 평범했다. 다만 기차를 함께 타고 온 이들의 모습이 무언가를 즐기러 가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보였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해가 떠있는 늦은 오후였다. 가방을 숙소에 풀어두고 도심을 향해 좀 걷다보니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향해 가까워질수록 풍경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평범한 차들 사이에 오래된 자동차 하나가 화려한 꽃 장식을 하고 초소형 전시장이 되어 있기도 하고, 커다란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다.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무용수가 오고간다. 노천카페를 공연의 무대로 삼고 있는 모양이었다. 숲과 공원, 골목과 광장, 공터 구석구석까지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시의 아스팔트와 오래된 벽도 공연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작품의 일부로 차경(借景) 된다. 


폴란드, 페타 페스티벌


1997년 시작된 그단스크(Grandsk)의 ‘페타 페스티벌(FETA Festival)’은 폴란드의 대표적인 거리예술축제 중 하나이다. 폴란드 북부의 도시 그단스크는 발틱해를 안고 있는 항구도시인데다가 침략과 해방을 거듭한 역사로 인해 다문화 도시, 그리고 자유도시의 상징이다. 바웬사가 노동조합의 수장으로 혁명의 선봉이 되어 공산주의 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킨 촛불이 된 도시이고, 세계대전 당시 도시의 원형이 모두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흔적들로부터 원래의 사진을 토대로 도시의 모습을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세워낸 곳이기도 하다. 


‘페타 페스티벌’은 거리예술을 통해 비범한 열정과 새로운 일을 실행할 용기, 그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순간들을 벌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열흘의 기간 동안 축제는 도시의 언덕, 산책로와 공원, 광장과 창고 등 다양한 공간을 장소로 활용하며 전 세계에서 참여한 거리예술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공개한다.


군사 시설이었던 곳들, 요새와 망루였던 장소들, 조금은 소외된 교외의 주택가까지 축제의 공연이 들어찬다. 공연 한 시간 전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이곳의 관객들에게 이 축제는 제법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거리예술은 ‘예술의 형태’가 아니라 ‘거리의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관객들은 거리예술이 제법 익숙하다는 듯이 광장과 공원의 바닥에 자리를 잡는다. 공연 시간과 장소를 챙겨보며 축제의 프로그램들을 따라다니는 열성 관객도 있고, 매년 돌아오는 축제가 제법 익숙한 듯 장을 보고 나오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흘깃 바라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한 데 섞여서 진득하니 공연을 보기 시작한다. 공연의 호흡과 함께 풍경이 잠시 달라지는 시간. 도시가 일상과는 제법 다른 모습을 한다.



프랑스, 비바시떼 페스티벌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있는 한 도시에 도착했다. ‘비바시떼 페스티벌(Festival Viva Cité)’이 열리는 소뜨빌르루앙(Sotteville-lès-Rouen)이 개최되는 도시이다. 1990년에 시작된 이 축제에 매년 수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한다.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광장을 중심으로 주거지역과 상권들이 모여 있고, 곳곳에는 큰 나무 그늘이 드리운 공원이 펼쳐져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 이곳이 축제 기간이 되면 일탈과 환상이 일상인 도시가 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거리예술 단체인 ‘제네릭 바푀(Generik Vapeur)’, ‘오포지토(Opposito)’ 등 수많은 예술단체들이 이 도시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도시의 숲, 광장, 주거지역 등 다양한 공간들의 장소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공연들이 축제를 통해 구현된다. 


축제에는 일반 관객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종사자들이 참여하여 작품을 관람하고 네트워킹을 이어간다. 아트마켓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종사자 교류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이곳은 축제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장소다. 매년 돌아오는 명절 때처럼 만나게 되는 반가운 얼굴들이 여기 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가 가진 정보를 교환하고, 바쁘게 동료를 찾고, 흥미로운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예술가와 프로듀서들이 서로를 소개하고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아뜰리에 231(Atelier 231)’은 프랑스 소뜨빌에 위치한 국립거리예술센터(CNAREP, Centre National des Arts de la Rue et de L’espace Public) 가운데 하나이자, 비바시떼 페스티벌의 거점이 되는 창작공간이다. 1998년에 개관하여 2010년 프랑스 문화부에서 국립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축제의 예술감독이 총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거리예술 작품의 창작을 지원하고, 작품의 유통과 지역 연계 활동을 비롯하여 거리예술과 공공공간예술에 대한 이해와 확장을 돕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비바시떼 페스티벌’은 이곳에서 창작된 작품들을 축제에서 선보이며, 프로그램 중 일부를 이 공간과 연계하여 발표하기도 한다. 구 기관차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의 규모와 구조가 여전히 산업화 초기를 대변하듯 남아 있으며, 제조 작업장으로 사용되던 공간은 현재 창작 스튜디오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 크라테레 쉬르파스


알레스(Ales)는 프랑스 남부의 도시이다. ‘크라테레 쉬르파스(Cratère Surfaces)’는 시립극장 라 크라테레(La Cratère)에서 주관하는 거리예술축제로, 기존의 실내 극장 공간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서 예술을 접할 기회가 적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외 프로그램의 필요성으로부터 창설되었다. 극장을 중심으로 거리와 광장, 공원에서 진행되던 프로그램을 최근에는 도시 외곽의 소도시들을 찾아가서 공연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곽과 교외의 울창한 숲 산책로 등 다양한 장소에서의 거리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 축제의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다. 


다른 프랑스 축제들과는 달리 작품들이 향후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꽤나 적극적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공연일 경우 최소 1회는 영어를 병기하거나 통역하여 해외 관객과 전문가들이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부담 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인 셈이다. 


프로듀서 그룹인 프로덕션 비스(Productions Bis)와 축제가 공동기획으로 진행하는 ‘거리예술랩(Outdoor Lab Experience, OLE)’ 역시 이러한 방향성의 연장선 상에 있다. ‘거리예술랩’은 신진 예술가, 프로듀서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매년 20명 내외의 인원들이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참여하며, 거리예술의 동향과 시장을 이해하고, 축제를 거점으로 국제교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대화에 참여한다.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축제의 프로그램을 참관하고, 각자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발전시키며, 토론과 교류의 장을 통해 거리예술 작품의 창작과 유통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스페인, 피라 타레가


축제가 일어난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도시, 스페인 카탈루니아 타레가(Tarrega)는 어쩌면 거리예술이 아니었다면 그 이름을 기억하기 힘든 곳이었을지 모른다. 이곳의 축제 ‘피라타레가(Fira Tarrega Teatre al Carre)’는 도시의 한계와 가능성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예술 실험과 교류의 장이다. ‘피라타레가’가 말하는 거리의 연극(Teatre Al Carrer)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을 통해 현재 진행형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공식 참가작을 제외하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프로그램은 ‘제작지원(Platform)’ 섹션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지니고 있는 신진 예술가들의 작업을 제작 지원하고 축제에서 창작을 위한 시설과 제작비 등을 사전 지원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으로, 각 작품들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예술감독이 자랑하는 프로그램들 대부분이 제작지원 섹션의 프로그램일만큼 이는 축제가 지향하는 점을 잘 드러내 준다. 


유럽의 축제들이 대부분 공식 초청작과 자유 참가작의 두 분류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피라타레가’는 축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을 주제와 키워드 등의 분류로 설명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축제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찾고 관객들에게 이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리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야기하는 ‘다양한 문화(Multiculturalism)’에 대한 접근이 축제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저마다의 사회적 맥락들로부터,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거리예술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워지는 것을 지향했다는 예술감독의 말에서도 이러한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피라타레가’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관점을 포용적으로 담아낸다. 기존의 사회가 이야기하던 가치들에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환영 받는다.



유럽의 거리예술은 투쟁과 저항정신으로 상징되는 68혁명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장소들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예술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광장과 거리에서 부르짖던 보편적 권리와 자유의 목소리는 인간의 삶과 그 본질에 대한 고찰을 담아냈고, 다양한 형태의 공공장소가 대중을 만나는 예술, 발언의 자리가 되었다. 놀이하며 즐기는 공동의 장소들이 만들어지고, 거리예술을 통해 예술의 폐쇄성을 허무는 대중화가 시도되었으며, 거리예술과 축제는 정치사회적 현실을 투영하고 비판하는 창으로서의 기능을 이어오고 있다.


축제가 시작되면 오래된 도시의 풍경이 바뀐다. 이전에 알던 곳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시민들에게 무대로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이내 삶의 곳곳으로 스민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거리예술과 축제의 힘은 여전히 일상의 자리에 의미 있는 사색과 환상으로 머무른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했을 그러한 생각의 힘, 거리에서 다시 그 힘을 꿈꿔본다.




원문 링크

https://webzine.ntok.go.kr/Article/Tradition/Details?articleId=198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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