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일기] 공연이 끝나면 글을 쓰려고
지난 겨울, 몸과 마음의 추위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것은 [하지만 나는 당신의] 작업이었다. 난민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나를 품어주었다니 어쩌면 아이러니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 덕에 나는 정신을 차렸고,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사실에 다시 힘을 냈다.
처음 [하지만 나는 당신의] 작업을 알게 된 것은 2024년 안산국제거리극축제의 리서치 공유회에서였다. 작가 채민이 써 내려가고 있는 이야기가 '하지만 나는 당신의'였다. 미등록이주아동의 이야기, 난민과 국경, 경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린이와 이웃에 대한 이야기. 박진서 '하지만 나는 당신의' 리뷰 - 떠나온 ‘우리’가 완성하는 도시의 기억
작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두근거렸다. 이 이야기가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는 데 손을 보탤 수 있다니! 여러 생각과 제안들이 절로 떠올랐다. 한 난민 가족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친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가 또 다른 이들에게 우리의 친구, 이웃을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는 팔꿈치의 활동범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에 보았던 팔꿈치의 활동범위 공연 중 [밤이면 밤마다 밤섬]이 기억났고, 그 공연에서처럼 작품의 이야기가 노랫말처럼 계속 뇌리에 남아서 전달되기를 바랐다. 꿋꿋하게 이야기 책을 펼쳐내는 팔꿈치의 다정함이 울컥하고야 마는 이 이야기를 보듬어서 잘 전달해 줄 것만 같았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밤이면 밤마다 밤섬' 리뷰
우리는 긴 호흡으로 대본을 여러 번 함께 읽어 내려갔다. 여러 프로덕션을 경험했지만 프로듀서로 일하며 이렇게 하나의 대본을 반복해서 읽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공연의 맥락이 다양하게 직조되었고, 여러 질문에 주석을 달아가며, 밑줄을 쳐가며 읽었다.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았고, 대본의 이야기들을 지도 위에 펼쳐놓기도 했다. 스물몇 가지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을 해서 소리를 들어보며 다른 언어로 감각해 보았고, 대본을 다른 순서로 엮어서 이야기의 논리와 시적인 연결을 자유로이 상상해 보았다. 관객과 무언가를 같이 읽으며 함께 소리 내는 장면을 떠올렸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분들을 작은 장면으로 오리고, 붙이고, 접고, 펼쳤다.
'빨간 실로 무언가를 엮어냈으면 좋겠다, 작은 손노동을 이어가며 이야기가 들려졌으면 좋겠다, 도시의 역사와 우리, 그리고 이웃의 미시사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보였으면 좋겠다, 대규모 간척부터 산업지구의 형성까지 이 도시가 지닌 서사가 지금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지도처럼 펼쳐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바라고 상상하는 그림이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공연은 리서치의 과정에서 구상했던 것들을 차곡차곡 담아냈다. 무대미술가 결은 종이가 아닌 천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선택했다. 재료가 무대가 되고, 무대가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게 연출가 진웅, 퍼포머 베튤, 중엽, 하루가 많이 고생했다. 이야기가 아주 많은 공연으로 거리극을 구현했던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면서도 '콩나물을 다듬는 손처럼' 무언가를 계속 엮어내고 펼쳐내고 이어냈던 배우들의 모습이 여전히 떠오른다. 어쩌면 '스펙터클만을 기대하는 축제'에게 조금 다른 공연을 보여주었던 것은 참 잘한 일 같다.
작가 채민의 글은 과한 감정을 담지 않고도 이야기에 몰입하게 했고, 슬픔과 분노도 꾹꾹 눌러써내려 가며, 끝내 아름다웠다. 실제 공연에서는 이야기되지 않았지만 '자격을 묻지 말아야지, 특히 아이들에게는'이라는 문장을 대본에서 읽으면서는 어쩐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인물들의 피할 수 없는 상황과 운명이 세상의 부조리와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온갖 마땅치 않은 이야기들이 가슴 깊숙이 남았다. 음악을 맡은 백하형기가 이 글에 박자와 멜로디를 더하며 악사로 참여했던 것도 참 좋았다. 악사가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들이 공연의 이야기에 바람을 불어넣고,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야기들을 함께 만들었다. 처음에 글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처럼 노랫말과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이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공연의 전후에 작업을 하며 함께 읽었던 책들을 도서관처럼 마련해 두었던 것,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 창작자가 함께 모여 도란도란 창작클럽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너무 신났다. 돌이켜보니 모두 준비 과정에서부터 상상했던 것들이었다. 글쓰기에 도움을 주셨던 센터에도 찾아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도란도란 창작클럽을 진행하는 방식을 고심하며 새로운 진행 아이디어도 많이 얻었다.
* 도란도란 창작클럽은 키워드로 공연의 여러 요소들을 나열해 두고, 하나씩 단어를 골라가며 작업의 과정과 공연의 특징들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창작자들의 이야기만큼이나 참여한 관객/동료/친구들의 이야기도 중요했기에, 1) 창작자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두고 진행한 뒤, 2) 관객들의 이야기를 돌아가며 듣고 3) 다시 창작자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방식을 선택했다. 함께 이야기를 하니 우리가 공연에서 다루었던 것들이 더 풍성하고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특히 천과 실이라는 공연 이후 이 이야기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오래전 보다 오래전
바다가 땅이 된 이야기
새 땅에 찾아온 나무들
뿌리와 뿌리를 엮어 숲을 만들었네
시간도 소문도 흘러
땅이 숲이 된 이야기
섬에게 숲은
땅도 뿌리도 내어주지 않았지
천 가지 이유로 떠 있는
천 그루 나무들
그 사이 피어난 새싹
공연에는 국영문 자막을 마련했다. 혹시라도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공연을 보러 올 수 있으니, 그리고 공연이 말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활자가 있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자막을 번역하고, 만들고, 이 과정에서 대본을 다시 살펴보며, 공연의 흐름과 구석구석의 전환에 깊이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실은 온갖 언어로 속삭임 통역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생각했었지만, 이 부분은 실제로 진행하지는 못했다. 공연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이들을 초대해서 ‘커뮤니티 드라마터그’의 역할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 부분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지는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았기에 이 공연은 다시 무대에 올라야 한다. (다짐)
공연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이제야 소회를 정리해 본다. 작품에 대한 소회보다는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생각에 대한 소회에 더 가깝다. 프로듀서, 기획자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종종 고민하게 될 때가 있는데 이 공연 [하지만 나는 당신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법 다 했던 (해야 했던) 프로젝트였다. 신이 나서 일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축제의 스태프들이 우리의 공연을 소중하게 아껴주어서 참 고마웠다. 비가 왔던 날도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관객과 함께 실내 공간으로 옮겨와서 차분히 공연을 해냈다.
공연 계속하고 싶다.
이 공연 계속하고 싶다.
이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좋다.
뭐 그런 자기애 가득한 생각들이어서 글로 남기기가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지. 이렇게 작업한 경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울컥하곤 했던, 그러면서도 나를 동시에 달래며 정신 차리게 했던 이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