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즈 플래닛 생방송을 보고
2017년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남들은 서른이 되는 걸 두려워할 때 막 서른이 된 나는 서른의 감회를 느낄 새가 없었다.
왜냐고? 나는 엔잡러로써 누구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느냐. 지금처럼 ‘작가의 정체성’과 ‘승무원의 정체성’으로 일하는 것? 아니다.
나는 ‘국민 프로듀서’로 일하느라 그 누구보다도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으로 대한민국이 뒤집어지기 이전 우리에게는 프로듀스 101이라는 훌륭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지지하고 응원하는 연습생의 데뷔를 응원하느라 밤낮으로 바빴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연습생이 1위로 데뷔했을 때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의 부모만큼이나 기뻤다.
그리고 2019년 2월 워너원이라는 그룹이 해체할 때까지 나는 줄곧 본업보다 어쩌면 더 열심히 그들을 ‘덕질’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2023년 그 시절의 열정과 설렘을 다 잊었다고 확신했던 나는 또다시 오랜만에 엔잡러로 바쁘게 지내게 되었다.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보이즈 플래닛’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결국엔 또 빠져들고만 것이다.
이번에는 ‘국민 프로듀서’가 아니라 ‘스타 크리에이터’로 이직했다. 후, 경력직이라 그런지 전보다는 적응이 수월했다.
유부녀의 신분으로, 아니 유부녀임을 내려놓고서라도 참가자들의 나이가 2007년생이 막내인 점을 감안하면 그래, 엔잡러는 무슨 그냥 내 일이나 열심히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덕질이란 ‘덕통사고’라는 말이 있듯이 예고 없이, 그렇게 훅- 다가와 저항할 수 없이 당.하.는 것이라 나는 신내림 받듯 찾아온 이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네?)
지난주, 생방송 순위 발표식을 끝으로 데뷔 멤버 9명이 정해졌다.
내가 가장 응원하는 연습생은 중국 국적의 ‘장하오’라는 연습생이다.
무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바이올린도 잘 켜는 팔방미인인 데다가 평소 한국어 말투는 어눌하지만 노래할 때의 발음만은 한국인 못지않아서 그의 열정과 재능에 매력을 느끼고 푹 빠져버렸다.
(구구절절 구차하지만, 사실 참 잘생겼다 ^^)
방송하는 내내 한국인 연습생인 ‘성한빈’ 연습생이 늘 압도적인 표차이로 단 한 번의 이변 없이 1위를 지켜오던 터라 내가 지지하는 연습생이지만 1위는 당연히 맘을 내려놓았고, 늘 하던 대로 2등의 자리에서 데뷔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모두의 예상을 깨고 놀랍게도 내가 응원하는 ‘장하오 연습생’이 1위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와, 그 순간의 짜릿함이란…?
국민 프로듀서 시절에 이어 스타 크리에이터 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습생이 1위로 뽑히는 큰 행운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국민으로서의 투표에는 실패했지만… 이럴 때라도 성공해서 참 다행이다.
(실패한 투표는 5년짜리이고, 성공한 지금의 투표는 2년 반 짜리이다. 어쩐지 조금 불공평한 기분이 들지만 괜찮다고 위로해 본다)
모든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가 그렇듯이, 연습생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데뷔의 꿈을 이룬 그들은 기쁨을 표현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감을 말한다.
아직 나보다 한창 어린, ‘소년’들이 벌써 ‘간절한 꿈’을 이루었고, 뽑아주셔서 감사하다며 설렘과 환희가 넘치는 얼굴을 하고 울며, 웃으며 감사를 전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문득, 그들의 수상소감에 자주 등장하는 ‘초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에게 연습생 시절이 있듯, 나에게도 취업 준비생 시절이 있었다.
아직 승무원이 된 것도 아니면서, 준비생 신분으로 삼삼오오 모여 스터디를 하고 모의 면접을 본다고 모여 흰 블라우스에 검정 정장치마를 입고 서툰 솜씨로 머리를 쪽져 묶으며 마치 승무원이 된 기분에 들떠 설렜던 시절.
회사에 몸담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회사 소식에 밝고, 들어가 본 적도 없는 회사 풍경을 상상하며 한껏 설렜던 이십 대의 내가 있었다.
그토록 바라고 간절했던 취업이 결정되고 감격에 겨워 썼던 일기장엔 이런 문장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는 이 회사를 사랑하는 나의 맘이 더 이상 동경이 아닌 애사심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와…. 사랑이라니, 애사심이라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새겨 넣듯 다짐하는 연습생들을 볼수록 그때의 나도 저만큼 간절했음을 느낀다.
입사만 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고, 저 유니폼을 한 번 입어볼 수만 있다면, 저 스카프를 나도 목에 둘러만 볼 수 있다면 하고 꿈꿨던 그 간절함.
취업이 내 인생 최고의 스펙이었던 것 같던, 그 황홀했던 순간.
지금은??
사실 이 글도 당장 내일의 출근이 너무도 끔찍하고 괴로워서, ’ 스타 크리에이터‘로서 딴짓을 하다가 까마득한 내 초심을 부활시켜 보고자 쓰고 있는 중이다.
회사는 ’ 동경‘의 대상에서 ’ 애사심‘의 대상이 잠깐 되었다가 ’ 욕받이‘가 되었고,
그렇게 입고 싶었던 유니폼은 ’하… 언제 다려… 아 또 뭐가 묻었어, 언제 빨아…‘ ’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니까 다 쳐다보지 ‘가 되어있다.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데뷔에 일조한 스타 크리에이터로서 그들의 초심이 얼마나 갈지 의문인 것은 이 때문이며,
내 사랑과 관심이 또 언제까지 유효할지도 의문이라 미리 그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는, 매우 열정이 넘쳤던 나지만 이제는 그때 그 그룹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나 가볍게 옮겨와 있다. )
우리 회사에도 이제 여름이면 ‘초심’ 무장 ‘간절함’ 끝에 데뷔!!! 의 느낌으로 사회초년생이 될 신입 승무원들이 입사한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신입 채용이 드디어 이루어져,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막내’들이다.
소문을 듣자 하니 소수 정예로만 뽑아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만을 뽑았다고 하던데!!
채용이 워낙 오랜만이라 바로 위 직속 선배도 2,3년 차일 거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숙한 우리 새 막내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환경임에 분명하다.
분명, 보이즈플래닛 못지않은 치열한 경쟁 속에 들어온 사회 풋내기들일 텐데, 초심을 잃지 않고 잘 적응하는 게 가능할지 벌써 가여운 맘이 든다.
이제 십 수년 전의 나의 병아리 시절은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노력하는 청춘들의 ‘데뷔’ ‘꿈 실현’을 도운 ‘스타크리에이터’로서,
나도 오랜만에 그때의 그 간절함을 떠올리며 조금 더 참고, 조금 덜 화내고, 감사한 맘을 가지고 출근을 해봐야겠다.
거듭 말하지만, 참 쉽지 않다.
신기루 같은 초심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