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손 내미는 용기

완벽한 아이를 읽고

by My Well

내리던 비는 잦아들었지만 젖은 바닥에 어렴풋이 비치는 가로등이 새벽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외투를 파고드는 찬 공기에 목이 뻐근해지던 와중에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봤지만 저마다 고개를 묻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싶었던 순간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하는 소리가 분명해졌다.


말 걸기 좋은 용모(?)를 가진 덕에 나는 평소 길 묻기, 사진 찍어주기, 때로는 포교의 대상으로 자주 선택되곤 했다. 우습지만 한 번은 하루에 몇 번이나 붙잡혔는지 세어 본 적도 있다. 집-학교를 왕복하는 동안 4번이 내가 기억하는 최고 기록인데 심심한 통학길에 재미요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생활반경이 줄어든 데다 흉흉한 사건들 탓인지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누군가 길에서 잠시만요 하고 다가오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지 약간은 조마조마하고 주춤한다. 그래서 그날도 소리의 발원지를 적극적으로 찾지는 않았다. 더구나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코앞을 부딪힐 듯 날아다니는 비둘기가 뒤섞이는 서울역 앞이었기에 고개를 휙 돌렸다 마는 딱 그 정도였다.


"도와드릴까요?"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검은 배경 속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보니 묵직한 전동휠체어가 광장을 가로지르는 난데없는 굵은 전선줄에 가로막힌 처지였다. "저쪽으로 가야 하는 데 이것 때문에 못 가겠어요..." 곧이어 길을 가던 익명의 세 사람이 모였고 힘을 모아 휠체어를 살짝 들어 선 너머로 옮겼다. 여자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부드러운 운전 솜씨로 유유히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면 항상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거기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고, 바쁜 일이 있어서든 나를 대신할 다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난 가끔은 힘을 보태는 사람이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심리학 수업에서 들은 내용은 꼭 새겨두었다. <불특정 다수가 있는 상황에서 도움을 받으려면 꼭 누군가를 특정해서 불러야 한다>고. 도움 받을 상황에서의 행동수칙은 꽤 집중해서 공부했던 탓인지 자세히 기억난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초등학생 때였던가 트렁크가 열린 채로 운전하고 있는 차를 보았다. 마침 신호에 걸려있길래 얼른 운전자에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번쩍 손을 들어 트렁크 열렸어요! 하고 소리쳤다. 운전자는 귀찮은 눈치로 고개만 까딱하더니 쌩하고 출발해 버렸다. 멋쩍어진 손을 내리면서 다음에는 트렁크 열고 다니는 차가 있어도 말해주지 말아야지 했다. 큰 짐을 싣고 가느라 트렁크를 잠시 열어둔 거였는데, 예상이 빗나가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래서인지 도와달라는 소리를 직접적으로 듣기 전에는 도움이 필요한 건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어서, 차라리 그런 상황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자라난다. 이런 눈치를 가지고 언젠가 도움이 필요해도 말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포착하고 먼저 손 내밀 수 있을까. 난 이제 지쳤다며 또 한번의 좌절을 겪게 하거나, 내 코가 석자라는 핑계로 회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남의 집안일에 간섭하냐고 가던 길이나 가라는 핀잔과 협박을 감내할 수 있을까.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다짐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미리 생각해봐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이 오면 함께 동굴을 나가자고, 용기 있게 손 내밀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조심스럽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