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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Apr 25. 2021

#21. 여행(8)

강릉

입사를 앞두고 아무것도 하는 것이 사뭇 억울해 짧은 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행선지는 강릉이다. 생각보다 서울에서 멀지도 않고, 자연과 음식이 공존하는 그런 곳. 한국은 아쉽게도 볼거리와 먹거리가 365일 구비돼 여행객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아이템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볼거리 중에서도 으뜸은 천연 자연이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고즈넉한 문화재 혹은 산업화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 곳은 전국을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강릉은 바다와 커피, 순두부 등 떠오르는 이미지가 선명하며 속초, 양양, 정동진 등 비슷한 듯 다른 인접 도시들과 연계가 되니 볼수록 매력 있는 관광지였다. 


도착 후 곧바로 숙소 근처에 칼국수 집에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이왕이면 관광객들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 좋다. 맛도 좋고, 여행지의 참 맛을 느끼는 듯한 생각이 더 든다. 



날씨가 정말 맑았다. 오죽헌에 들러 주변 카페에 들어갔더니 커피 빵과 잼을 팔고 있었다. 확실히 커피가 유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널찍한 공간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정갈한 한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도시나 옛 관청 혹은 유명인의 생가가 있기 마련이다. 오죽헌 내에는 여러 작은 박물관들이 테마별로 있었다. 많은 유물들이 기증돼 전시돼 있었다. 콘텐츠가 꽉 차 보였다.


알록달록한 관청의 기와와 처마와 달리 일반 주거지로 이용된 양반댁 한옥들은 또 다른 맛이 있다. 정갈하고 정제된 색상이 바로 그것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언덕을 등지고 한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죽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설명은 생략한다.


오죽헌 내 박물관에 들어갔더니, 옛 선비들이 과거를 공부한 흔적들이 있었다. 과거에는 이런 '잡다한' 유물들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공부를 하며 그들의 입장을 비슷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 되고 보니 퍽 궁금해졌다. 


이 유물을 통해 2가지를 알 수 있다. 현대의 단어장처럼 과거에는 죽간통이 있어, 암기에는 왕도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들은 경구를 암기했다는 것이다. 즉, 문장을 통으로 외우며 그 문장 속 함축된 의미를 단어 하나처럼 떠올리며 공부했다는 것이다. 


숙종의 한글 어찰이다. 


반가운 유물이었다(인쇄본). 즐겨 구독하는 어느 언어학 유튜브 채널에서 이 편지를 중세국어식 발음을 재연해 읽은 것이 무언가 정겹게 들렸기 때문이다. 


유튜브- 향문천, 1분 23초 중세국어 발음 확인


"밤사이 평안하셨습니까?... 아무리 섭섭하셔도 부디 내일 들어옵소서"


한자를 다 잊어 읽을 줄을 모르겠다. 어필이었던 것 같다. 왠지 왕의 필기라고 하니, 까막눈에게도 글자에서 알 수 없는 아우라고 이내 생기려고 한다. 사람은 그렇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를 따라 향교를 제집 앞마당처럼 다닌 적이 있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다른 할아버지들께서 바둑을 두다가 나를 반기셨다. 그리고 흐릿한 한마디를 내게 전하셨다. 이곳에선 어떤 인성 교육이 이루어질까? 


노란 은행잎이 파란 하늘과 만나 HD 화질을 뽐내고 있다. 



바다로 왔다. 힘겹게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취직 준비를 했고, 두 달만에 직장인이 됐다. 남은 시간 그냥 보내기가 아까워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여행에 왔다. 여행은 망각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급한 망각, 그것이 필요했다. 


멍하니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을 보고 있었다. 지친 마음을 한편에서 정리하고, 새로 들어올 격동의 시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틀은 어쩌면 참 짧은 시간이다. 


맑은 날씨가 한 몫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해안가와 맑은 하늘, 막힘없는 파도가 있어 내 마음도 한 결 가벼워진다. 


왠지 유행 타는 감성 사진을 찍기 좋아 보여 나도 찍어보았다. 나는 유행을 고집스럽게 따르고 싶지 않아 했다. 남들 다하는 그것이 재미도 별로 없어 보였고, 그런 유행을 선도할 자신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찾고 매진하는 것이 차라리 쉽다. 


여러 카페가 있었다. 선택이 어려웠다. 때로는 우리에게 너무 주어진 것이 많아 선택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확고한 기준이 필요하다. 


서울에도 체인점이 있는 이 대형 카페를 강릉에서 처음 접했다. 넓은 공간에 노출 콘크리트, 높은 층고 등이 이 집이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쿠키는 평범했지만 체인점 치고 퍽 괜찮은 핸드드립 커피가 내려졌다. 예전엔 그저 아. 아, 따. 아. 만 찾았다면 이젠 사람들도 드립 커피를 많이 찾아 마시는 것 같다. 


또 다른 테라로사로 왔다. 이곳이 공간이 훨씬 더 괜찮아 보였다. 


옹심이 칼국수를 먹었다. 아침 일찍 현지인들이 잘 다닌다는 곳으로 굽이굽이 차를 몰아 기어코 먹었다. 걸쭉한 국물과 쫀득한 식감의 옹심이 덕에 만족스러웠다. 약간의 수육이 서비스로 나왔다. 


새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회국수였다. 사장님께 여쭈어보니 점점 관광객들이 알고 찾아온다고 했다. 딱 봐도 현지인들만 찾아오는 곳이었다. 


강릉은 초당순두부가 유명한데, 순두부를 파생해 젤라토나 푸딩 등 길거리 음식들도 많았다. 한 순두부 푸딩 집이었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된 푸딩만 팔았다. 텅 빈 공간에 눈에 띄었다. 가끔은 비움도 필요하다. 어색함의 강물을 건너서.


고요했다.


강릉에 왔는데 정동진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해 뜨는 것을 보러 새벽 일찍 어디론가 다녀본 적이 없다. 새벽 일찍 차를 끌고 정동진에 갔다. 그런데 일출 시간을 잘 못 봐 한 시간이나 일찍 정동진에 도착했다. 검은 해변을 커피 한 잔 들고 걸었다. 일출 시간이 다가오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날이 흐려 뜨는 해를 보지는 못했지만, 고요한 풍경 속 일출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특이했다. 알 수 없는 긴장과 고요 그리고 설렘이 공존하는 듯했다. 



역시 촌놈이라 시장도 좋다. 먹거리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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