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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May 17. 2024

<레슨 인 케미스트리>



처음엔 생각했다. ‘화학(케미스트리)’과 남녀평등이 무슨 상관인가. 화학은 다른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골프, 자동차, 금융투자 등 단성성(single-sex)의 대표적인 표식들. 하지만 이내 소설의 주제 소재가 ‘화학(케미스트리)’이어야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차별과 성평등을 논할 때 화학은 유용하다. 화학에는 성(sex)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학이 중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양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화학 자체에는 성이 없다. 여성과 남성이 아닌 전기적으로 양성, 음성, 중성이 존재할 뿐이다.



소설이 1960년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한계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주인공을 그린 것에 반해 주인공의 이름은 여성성이 강한 ‘엘리자베스’라는 점이 의외다. 허나 주인공 엘리자배스가 운명의 사랑 캘빈 에번스, 즉 남자라는 존재가 죽고 사생아 딸 ‘매드(매들린)’이 탄생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회에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녀의 이름이 엘리자베스가 되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운명의 사랑 캘빈 에번스가 일찍 죽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와 별개로 (실제로 나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와 그들의 반려견 여섯시-삼십분이 슬퍼하는 대목에서 세 번이나 울었다), 캘빈이 죽고 나서야 엘리자베스는 연구실을 떠난 다른 곳에서 그녀로 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무대가 그녀가 인정하는 ‘자신이 있어야할 곳’은 아니었지만. 딸의 이름이 ‘매들린’에서 간호사의 실수로 우연히 ‘매드’가 된 것도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매들린 보단 매드가 더 중성적이다. 무엇보다 매드는-물론 ‘화가 난’이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만들어지다 만 듯한 이름으로 아직 미완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이름에서 여성의 한계에 부딪혔다면, 남성 캘빈이 죽고, 중성적 이름의 딸 매드가 태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에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설정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다.



이 책은 성차별에 대응하는 용감한 여성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성차별이나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나’ 스스로 임을 알려준다. 그것이 작가가 소재를 화학(케미스트리)으로 선택한 이유 아닐까. 우리는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절대자의 해결이나 구원 같은 총체적이며 비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손쉬운 해결책을 원한다. 동시에 실재적이며 합리적인 해결책을 외면하는데 가령 ‘나 자신’ 같은 것들이다. 엘리자베스는 단순히 성차별에 대항하는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한계짓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용기있는 인물이다.



나를 구성하는 건 시대에 의해 요구되는 역할이나 지위가 아니라, 삶 속에서 행해지는 매 순간의 ‘선택’이다. 선택에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올바른 선택을 위한 가치관, 미루지 않고 선택하는 용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성숙함이 모두 필요하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나를 옥죄는 것은 사실 대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나를 옥죄는 것은 파놉티콘 같이 나를 ‘감시’하는 누군가가 존재하여 나를 한계짓는 것이라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스스로’ 신독’하여 아무도 지켜보는 이가 없는 환경에서도 스스로 검열하고 올바른 마음과 신체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삶의 모든 문제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옳고 그름, 긍정과 부정, 상승과 하락, 진보와 보수. 양자택일의 문제가 대부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절대적인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에 의해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가 결정된다. 다름을 수용하는 것, 실패를 과정으로 여기는 것, 나아가 대치관계에 있는 존재나 개념을 포용하고 변증적으로 사고를 성장시키는 것이 삶의 궁극적 해답이라면 해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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