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침으로써 넓혀진 지평”
다른 4세대 걸그룹과 같이 상향세로 달리던 르세라핌의 앞길을 막은 건 다름 아닌 그들의 실력이었다. 세계적인 무대 코첼라에서 ‘가수’로서의 실력이 민낯처럼 드러나며 높이 올라가던 본인의 발목을 스스로 잡은 것이다.
이후 그들이 겪은 고초에는 SNS 상에서 여실히 드러난 개인주의가 큰 몫을 했다. 사람들은 아이돌을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저기 먼 인터넷 세상 속 한 물체로 볼 때가 있다. 그들은 르세라핌을 잔인하게 찢어놓고 후에 최선을 다해 노력한 무대를 보고도 비웃었다. 우리는 인터넷이 발전해 가며 익명의 그늘 안에서 타오르는 햇빛 아래 우리와 같은 ’사람‘을 세워두고 있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르세라핌을 욕한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말을 하고자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도 큰 몫을 했지만, 르세라핌 스스로 걸어온 길이 그들을 무너지게 만들기도 했다.
걸크러쉬에서 시작되어 여전사를 표상하는 높은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을 앞세운 4세대 걸그룹 중 르세라핌은 그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데뷔부터 두려움이 없었고(‘FEARLESS’) 부딪혀도 깨지지 않는다 자신했고(‘ANTIFRAGILE’) 용서 따위 구하지도 않았다(‘UNFORGIVEN’). 그렇게 높은 곳까지 다다른 그들은 “나만 계속 운이 좋은 거 같아서 화가 나니? 세상이 우리한테만 쉬운 거 같니?‘(’Good Bones’)라 말하며 그건 우리가 쉬워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말했다(‘EASY’). 너무 지나친 자기애와 우월주의는 독이 된다.
앞장서는 든든한 여전사를 지나쳐, 혼자 잘났다고 앞서가는 밉상이 되는 그 한 끗을 넘어버린 것이다. 높이가 올라갈수록 폭, 면적이 넓어야 버틸 힘이 생긴다. 그들은 한없이 높이만 올려 그들 스스로도 발 디딜 곳이 없어졌고 코첼라 사태로 밀쳐진 르세라핌은 끝없이 추락했다.
큰 추락을 경험한 르세라핌이 컴백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충분히 아니 과하게도 욕을 먹은 그들이 어떤 발전적인 음악과 실력을 준비했을까를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음악 하나 때문에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은 왜 음악 하나 때문에 그렇게 손가락 몇 번을 움직여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나? 음악 때문이 아니라 국제적인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트린 게 문제라고도 말한다. 미국 빌보드와 영국 NME는 르세라핌이 무대를 장악했다 극찬했으며 대부분의 혹평은 코첼라 온라인 라이브로 접해 댓글을 다는 한국인이었다. 물론 그 속엔 멤버들의 부족한 가창력도 분명했지만 코첼라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부족한 온라인 음향 시스템의 문제도 있었다.(세계적인 가수 Lana Del Rey도 코첼라 무대에서 혹평이 쏟아졌다. 이 문제로 온라인 송출을 그냥 하지 말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다. 아무튼 객관적인 시선으로 음악을 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니.
르세라핌의 새 EP [CRAZY]는 일련의 사건 이후 그들이 앞으로 가져갈 행보를 보여준다. 그들은 미치기로 했다. 그리고 미침의 도구로 번개를 활용한다.
강렬한 전자음악 사운드는 에스파가 ‘쇠 맛’이라면 르세라핌은 ‘번개 맛’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Chasing Lightning>에서 계속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가 마치 감전된 주인을 보고 짓는 듯하고 <CRAZY>에선 전자음악 그 자체가 되어 사운드를 입으로 표현한다.(‘da da da da …’ 후렴구) 뮤직비디오 또한 적당히 미쳐있지 않다. 중간중간 버퍼링이 걸리기도 하고 미치지 않고선 볼 수 없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일반 대중의 시선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안무가 아닌 ’보깅‘을 선택한 것도 이 미침의 일종일 것이다.
음악에서도 두 가지 키워드 ’번개‘와 ’미침‘을 두루두루 잘 활용하고 있다. EDM의 하우스와 테크노로 시작을 달구고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샘플링한 <Pierrot>으로 중독성을 높인 후 일렉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1-800-hot-n-fun>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르세라핌의 복귀에 필요했던 요소가 <미치지 못하는 이유>에 있다. 멤버 허윤진이 메인 프로듀싱을 맡은 이 곡에선, 항상 위를 보고 앞서 나가던 르세라핌이 아래를 바라본다. 후회와 성장통을 가지고 ‘미칠 수 있다는 건 부러운 것’이라 말한다. 높이만 쌓아가던 르세라핌이 2차원의 지평을 넓혀 안전하게 서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뒤처진 이들에겐 위로와 용기를 전한다. 르세라핌
스스로도 미치기를 결심하기 전에 가진 반성의 시간을 엿볼 수 있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항상 앞서가다 넘어진 르세라핌에게 필요한 것은 뒤를 볼 줄 아는 태도였다. 이번 앨범을 통해 르세라핌은 현재를 미치면서도 그러지 못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는 그룹으로 성장했다.
물론 프로듀싱에서 부족한 면도 보인다. 특히 <CRAZY>에서 홍은채의 짧은 랩파트는 매력이 너무 떨어진다. 이후 멤버들이 이어받는 파트는 또 잘 짜여졌다. 이렇게 프로듀싱한 이유가 묻고 싶을 정도다. 유독 홍은채의 파트만 매력 없게 만들어낸다.
지금 르세라핌의 차트 성적과 여론을 보면 음악에 비해 너무 참담하다. 제대로 박힌 가시를 빼내기 위해선 그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가시를 누르고 있는 우리가 힘을 빼야만 한다. 이제 데뷔 2년 차인 르세라핌이 노력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시간은 아직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