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꽃을 닮은 인물화 《김종학 : 사람이 꽃이다》, 현대화랑, (~2024.04.07)
봄꽃 소식이 여기저기 들리지만 '꽃구경'이란 말은 아직 어색한 미성숙한 봄입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 햇볕이 잘 드는 몇몇 곳에서 만개한 산수유랑 개나리를 보긴 했는데, 다른 식물들은 여전히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썩 좋아하진 않지만 올해는 꽃 구경도 가보고, 제대로 놀아보려고 여러 구상 중입니다. ㅎ 자연의 꽃은 아직 필 때를 기다려야 하니, 대신 활짝 핀 사람 꽃을 볼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해 드릴게요.
삼청동 초입에 있는 현대화랑에서는 현재 원로화가 김종학(1937-)의 《사람이 꽃이다》전이 진행 중입니다. 우연히 들렀는데 전시가 참 좋더라고요. "김종학"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지나칠 수 없는 전시로, 대중적으로는 설악산에서 그린 꽃 그림을 많이 알고, 보고, 좋아하지만, 그의 인물화 역시 그를 대표하는 화제입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60여 년의 화업 기간 중 그의 인물화를 특별 조명하는 전시로, 출품된 143점의 작품 대부분이 대중들에겐 처음 소개되는 거죠.
참고로 현대화랑은 우리나라 대표 상업 화랑 중 하나입니다. 1970년 4월 4일 인사동 개업 후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는데, 1970년 이전에 개업한 화랑이 대부분 문을 닫아 현대화랑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랑이 되었어요. 갤러리현대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할 텐데 이 이름은 1987년부터 썼고, 우리에게 익숙한 3층 규모의 갤러리현대 건물은 1995년부터 사용했죠. 전시 성격이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 신관인 갤러리현대는 들러도 본관인 현대화랑은 잘 들르지 않는데, 모체가 현대화랑이고 미술사적 의미가 더 짙은 작품들이 본관에서 집중 소개되니, 앞으로는 꼭 두 곳을 다 챙겨 보세요. 현대화랑은, 우리 미술계를 대표하는 백남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천경자, 유영국, 박서보 등 예술가들의 작품을 발굴 및 전시하고 프로모션 한 곳으로, 화단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한 의미 있는 곳이거든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김종학 화백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1962)를 졸업하고 동경미술대학 서양화 판화과(1968)와 프랫 대학원 그래픽 센터(1977)에서 연수를 받았어요. 2남 1녀 중 차남으로 부친은 광산업과 석유 무역을 했던 사업가였고, 그의 어린 시절 우상인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선비였다고 하죠. 해방 후 지주라는 이유로 탄압받아 월남했다는데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도 꽤 성공했고, 작가도 당대 최고 명문이던 경기고를 졸업합니다. 화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그 시기에도 작가는 화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애석하게도 50세가 될 때까진 한 번도 제대로 그림을 팔진 못했다고 해요.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탐구와 방황은 지속되었는데, 1979년 가정생활이 파탄 나면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고 미국에서의 배회하던 삶을 끝내고 급히 귀국해 설악산에 강제 정착합니다. 자식에게 남겨줄 작품 100점을 다 그리기 전엔 하산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요.
그를 이야기할 때 꼭 듣게 되는 이 일화는, 대중들에게도 깊게 각인되었고, 그가 설악산에서 지내며 보고 그린 꽃들과 자연물, 설악산은 작가의 이런 스토리를 입고 그를 더 대중적으로 환영받는 작가로 성장케 했죠. 누구나 그렇듯 그의 삶에도 묘사되지 못한 많은 디테일이 있지만, 김종학 화백과 설악산, 그리고 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임에는 확실합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다양한 시도를 한 작가입니다. 인물화도 그중 하나죠. 그래서 이번 전시가 더 반가운 거고요.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인물화를 그리면서 초기 인물화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자코메티 같은 흠모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런 이유인지 주변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 그렸다고는 하나 그 표현법은 고전부터 현대적인 방식까지 아주 다채로워요. 본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작가의 심상에 따라 묘사되었기에 더 그렇겠지만 유명 화가가 떠오르는 화풍부터 창의적인 화풍까지 묘사법이 다양하고, 그림 속 인물은 제가 분명 모르는 사람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과 겹쳐지기도 하고, 화폭에 크고 작게 담긴 각각의 인물이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누구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화제로 특정되지 않았기에 그린 이를 빼곤 그 사연을 알 수 없습니다. 알록달록 생김새가 다른 인물들의 모습은 다양한 색과 형태를 자랑하는 야생화를 닮아, 보다 보면 '그러네, 꽃만큼 아름답네'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어요. 많은 인물화 중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가족 초상화입니다. 간결하게 그려져 신체적 특징만 두드러지지만, 그래도 사진보다 낫더라고요 상상할 수 있는 폭이 더 넓어서.
전시장 1,2층에 인물화가 가득하긴 하지만, 그의 꽃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사연이 덧입혀진 탓도 있겠지만 그의 꽃 그림은 뭔가 '극복과 수련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어 슬퍼 보이면서도,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쨍한 색감과 꽃과 늘 함께 하는 벌레와 새 덕에 기분이 좋아지고 향기까지 전해지는 듯해요. 그래서 한번 보면 잊기가 어렵죠. 희로애락이 느껴지는 인물의 초상 같달까?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고 모든 자연물이 1:1 사이즈로 묘사되어 각각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키죠. 두꺼운 마티에르의 표현도 드라마틱 한 분위기에 한몫하고, 크기도 커 거인의 꽃밭을 거니는 기분도 나고요. 그러니 한 번도 그의 꽃 그림을 본 적 없다면 이번 기회를 꼭 놓치지 마세요.
작가는 그의 할아버지가 했던 말 중 "사십 세에 황제, 재벌, 장군은 될 수 있어도, 화가는 육십이 넘어야 하고, 시인은 칠십이 넘어야 한다"라는 말을 평생 작가의 방에 걸어두었다고 해요. 할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90을 바라보는 작가는, 이미지로 시를 쓰는 화가의 경지 그 이상에 다다른 거겠죠.
흔히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잖아요. 이 전시를 보면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됩니다. 부가 설명이 필요 없죠. 여러 이유로 지나치긴 아까운 전시이니, 전시 종료 전에 꼭 챙겨 보기 바랍니다. 아, 김종학 화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삼층 찬탁 등 292점을 기증한 기증자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게 되면 어떤 유물들이 있는지도 한번 살펴보시고요.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