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공간 이야기
만화 덕후들의 캐릭터 교과서 《한국만화박물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길주로 1
이제 좀 체감이 됩니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봄이란 계절이.
이전 글에서 그렇게 '꽃놀이'타령을 했는데, 첫행보였던 윤중로 축제는 꽃이 거의 피지 않았을 시기에 다녀와서 어떤 감흥도 없었어요. 개화를 기다리는 꽃망울들이 어찌나 소중하던지, 그 작고 여린 꽃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예쁘고 풍성하게 카메라로 담을 수 있을까 고심했던 기억만 나네요. 그날을 계기로 앞으로는 인력으로 소확행을 누릴 수 있는 것에만 기대를 얹어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 )
오늘 소개드릴 한국만화박물관은 소확행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전 연령대에게 열린 곳이지만, 친구처럼 향유한 문화가 비슷한 세대와 함께 간다면 더 좋을 장소예요. 제가 이 근처에 산다면, 전 주기적으로 박물관 2층 만화도서관을 찾아 한쪽 벽 서가 끝에서 반대편 서가 끝 순서로 소장 도서 전체를 완독 했을 겁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만화책 소장처라니! 진심으로 이 근방에 사는 부천 시민들이 부럽습니다.
한국만화박물관은 7호선 삼산체육관 역에서 도보 5분 이내 거리에 있습니다. 5번 출구로 나와 왼쪽을 보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고, 이 건물 뒤쪽으로 한국만화박물관이 있습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건물 쪽으로 다가가면 한국만화박물관까지 계단을 따라 이동하라는 표지가 보이고, 그 계단 끝까지 내려가면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들 소조상들과 함께 한국만화박물관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때부터 막 설레요 ㅎ
오기 전엔 '규모가 뭐 얼마나 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와 보니 상당히 크고 넓더라고요. 밖에서 본 건물 크기가 실 규모로, 확 트인 공간감을 주는 로비엔 구석구석 다양한 설치물들이 들어와 있어 일반 박물관의 느낌보다는 복합몰 로비 같은 이미지가 좀 더 강합니다. 박물관은 유료입장이지만 1층 기획전시실과 2층 만화도서관은 무료로 부담 없이 공간과 설비를 이용할 수 있어요. 1층 카페와 굿즈 숍, 체험 프로그램과 편의 시설들도 각자 편의에 맞게 취사선택할 수 있고요. 박물관 1층과 3층 전시실 내엔 영화관과 영상관이 있는데, 1층 영화관에서는 개봉 중인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3층 전시실에서는 한 영화의 특별 편집 버전을 3D로 짧게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유료입장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할 부모님들이라면, 아이들을 영화관에 착석시킨 후 로비 카페나 2층 만화도서관에서 개인 여가를 보내도 되겠더라고요.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현재 제2회 다양성 만화 전시인 <형형색색>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기획전시실이 1층과 3층에 자리해 1층 기획전에선 두 작품만 볼 수 있고 나머지 네 작품은 3층 제2기획전시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획전을 다 보려면 어차피 입장권은 사야 해요. 관람 동선은 1층 기획전시실을 보고 3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 후 직원분에게 손목 팔찌형 입장권을 확인받고 제2 기획전시실, 상설전시관 순서로 보면 됩니다. 4층 만화 체험관도 3층 내부 통로로 바로 연결돼서 안내 지도를 참고하거나 표시를 찾아가지 않아도 물 흐르듯 연결해서 보게 됩니다.
4월 21일까지 진행되는 <형형색색> 기획전은 2022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다양성 만화 제작 지원 사업'의 지원을 받아 창작된 65편의 만화 중 6편의 만화를 선별해서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다루는 이야기들도 색달랐는데, 선정작 '떼루아의 맛'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프랑스 남자 도미니끄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농부의 꿈을 위해 가족과 함께 충북의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하며 포도 농사를 짓는 이야기이고, '노인의 꿈'은 그림을 배워본 적 없는 심춘애 할머니가 꿈을 이루기 위해 미술 학원을 방문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요. 전부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이었지만, 각 작품 부스마다 작품 등장인물 관계도와 주요 장면들을 도판으로 설치해 뒀고 대략적인 내용들도 적어둬서 보기에 불편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부스를 작품 분위기에 맞게 색다른 콘셉트로 꾸며 이야기와 그림에 몰입해서 보고 즐기기 좋고요.
3층 기획전시실에선 '어떤 탐험 일지', '미용실 스태프', '적색목록', '하나의 사물'이 소개됩니다. '어떤 탐험 일지'에서는 옛 골목의 풍경이, '미용실 스태프'에서는 사회 초년생이 일하는 미용실의 정경이, '적색목록'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과 인간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물'에서는 애착 사물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내용이 가볍지 않아서 곱씹게 되고요. 전시장엔 원작도 볼 수 있게 구비되어 있는데, 아무리 짧다고 해도 후루룩 서서 볼 수 있는 내용과 두께는 아니어서, 저는 나중에 찾아보려 작가 이름과 제목만 적어 왔습니다. 시간 여유가 된다면 2층 만화도서관에서 각 작품들을 보고 오셔도 되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은 3층 상설전시관입니다. 예전에 제가 만화를 주제로 글을 남긴 적이 있지만 글 속에 언급했던 작품들의 실물을 다 보진 못했었는데, 그 실물들이 거의 다 전시 중이고, 1910년대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만화의 흐름과 대표작들을 보여주고 있어 제겐 꽤 학습 효과가 있었거든요. 한국 만화 통사를 요약본으로 마주한 것 같달까? 공부라는 무게감 없이 인문교양을 쌓고 온 거죠. 저는 어렸을 때 텔레비전 만화는 봤어도 별도로 만화책을 챙겨보던 성향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생각보다 많은 캐릭터들을 알고 있어서 좀 당황스러웠어요. 물론 특정 시대 특정 기간에 속한 만화들이지만, 그 캐릭터의 이름을 알고 분별할 수 있다는 건 제가 그만큼 TV 만화를 많이 봤다는 반증이잖아요 ㅎ
박물관 전시지만 상설 전엔 설치물들이 많아 지루하지 않습니다. 전시 설명과 분량도 적절해 텍스트에 눌리지 않고 전시물을 하나하나 보게 되고요. 전반적으로 텍스트보다 실물 자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읽어내야 할 것들이 아주 적진 않아서, 조금 집중해서 보려면 상설전시실에서만 1시간 이상은 예상하셔야 합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지만 보다 지치면 앉아 쉬면서 비치된 만화책도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신선놀음이긴 하죠. 게다가 모든 곳이 다 포토존이라 옛날 만화방 풍경부터 캐릭터 소조상, 벽화까지 아는 캐릭터를 만난 반가움에 마구 사진을 찍다 보면 백 장 넘기는 건 정말 순식간이고요. 심지어 사진도 색다르게 잘 나와서, 평소 사진 찍기에 큰 관심 없던 제 친구도 그날은 열심히 찍더라고요.
3층이 시사만화와 종이 만화책 세대의 결과물을 보여준다면 4층은 만화 체험관은 디지털 시대의 만화와 드라마화된 만화 원작들을 소개합니다. 웹툰 전시존에서는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화된 인기 웹툰을 모아뒀는데, 보다 보니 잊은 듯했던 주요 장면들과 대사들이 떠오르긴 하더라고요. 보면서, 왜 집에 있던 만화책들을 다 버렸을까 후회도 조금 되었고요. 사람은 정말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맞아요.
4층 체험관도 볼 게 많습니다. 우선 '만화가의 머릿속'이라는 설치 공간은 만화가의 뇌구조를 직접 탐방해 볼 수 있게 구성되었는데, 잠든 만화가의 정수리로 들어가는 형태의 외관 조형도 특징적이지만, 안에도 미로처럼 여러 장치가 되어 있어 사람의 뇌가 얼마나 복잡다단한지를 간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 클라쓰'는 별도의 전시공간에서 더 자세히 만날 수 있는데, 이야기 속 주점을 모티브로 꾸민 공간에선 사진도 찍고, 원화에 색도 입혀 볼 수 있고, 의자에 앉아 만화책도 볼 수 있습니다.
'칸의 세계'는 각 부스로 나눠진 공간 안에서 시대별 만화 속 장면을 보거나, 체험하거나,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는 등 여러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꾸민 체험 공간입니다. 게임 실사판의 느낌인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구성과 퀄리티예요. 그렇다고 성인이 즐길 수 없는 곳은 아니고요. 칸의 세계가 상설전의 마지막 전시라 여기까지 봤다면 그다음엔 자유롭게 나머지 부속 공간들을 둘러보면 됩니다. 저는 칸의 세계까지 본 후에 2층 만화도서관으로 가서 잠시 쉬면서 만화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좌석이 많았지만 창가 쪽으로 난 좌석이 유독 마음에 들더라고요.
박물관에선 만화책 읽은 시간까지 포함해서 한 5시간 정도 머물렀는데,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개인적으로 굿즈 숍이 많이 아쉬웠어요. 각 세대가 선호하는 만화 캐릭터들로 만든 문화상품에 대한 수요가 분명 있을 텐데, 저작권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품이 너무 다양하지 않더라고요. 그나마 독고탁 열쇠고리가 괜찮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어서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습니다. 둘리박물관이 재개관하면 거기에 가서 못 산 굿즈의 한을 좀 풀고 와야겠어요 ㅎㅎㅎ
만화박물관 주변 정원에는 만화 캐릭터 소조상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요즘 같은 계절엔 꽃나무들과 어우러져 더 동화 속 세상같이 예쁘고요. 그렇다고 너무 어두우면 자연물들이 잘 보이지 않으니 박물관 관람 및 만화도서관 이용 시간 잘 계획하셔서 꼭 어둡기 전에 박물관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보길 권해드립니다. 다 보신 후 날씨가 좋다면, 근처 상동호수 공원으로 걸음을 옮겨도 좋고요.
저희 동네는 아직 봄기운이 강하지 않지만 시내엔 따뜻한 체감기온에 반팔을 입고 다니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 계절엔 레이어드가 답이라 저는 아직 두꺼운 옷부터 얇은 옷까지 겹쳐 입는데, 며칠만 더 지나면 반팔에 얇은 셔츠만 입고 나가도 괜찮을 듯합니다.
계절은 즐기는 자의 것이라고 하니, 즐길 수 있을 때 이 봄을 만끽하길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