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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아샴《서울 3024-발굴된 미래 》, 롯데뮤지엄

전시 이야기

다니엘 아샴 《서울 3024-발굴된 미래 》, 롯데뮤지엄, (2024.7.12~10.13)(feat. 상상의 고고학)


태풍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젠 진심으로 여름과 작별하고 싶다'란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억수로 비가 내린 후엔 거짓말처럼 가을이 성큼 아니 그냥 가을입니다. 


올해 정말 너무 더웠잖아요. 더 무서운 건, 앞으로가 더 덥고 호우도 더 잦아질 거란 사실. 닥치면 어떻게든 살아가긴 하겠지만, 오늘따라 이 말이 더 와닿긴 하네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말로 알려진 이 글은, 지구가 멸망해 지금 하는 일들이 소용없어져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이지만, 저는 그 의미에 나무를 더 심어 지구 온도를 낮춰보겠다는 다짐까지 얹어봅니다. 어떤 나무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근데, 우리가 익히 들어 익숙한 이 말이 16세기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먼저 했다는 건 아시나요? 그가 청소년기에 머물렀던 아이제나흐의 2층 집 앞 기념비석에  ‘그리고, 내일 세상이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마르틴 루터’(Und wenn ich wte, da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geht, wurde ich doch heute mein Apfelbaumchen pflanzen.)라고 쓰여있대요. 그 기념비석 옆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고요.


누가 먼저 말을 했든, 저 역시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_____^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오늘 소개할 전시는 롯데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 1980-)의 《서울 3024 -발굴된 미래》입니다.  8월 초에 전시를 봤고 그 후에 틈날 때마다 끄적끄적했는데, 마무리를 못한 채 9월 말이 됐어요. 다니엘 아샴은 현대미술을 좋아하거나 예술품 경매에 관심이 있거나, 패션에 관심이 많다면 분명 이름을 들어보셨을 텐데,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적 인기에 비해 국내 인지도는 낮은 편입니다. 


제가 전시를 보러 간 날 어떤 관람객이 같이 온 분에게 아샴을 "현대미술 작가 중 인스타그램 가장 팔로워가 많대"라고 소개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그런가? 그 정돈가?' 싶어 바로 검색을 해봤죠. 146만. 음... 그래도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뱅크시(Banksy)를 검색해 봤죠. 1329만. 다른 작가를 더 검색해 보진 않았지만 현존하는 현대미술 작가 중 가장 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아티스트는 뱅크시이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도 계속 늘고 있으니. 화제성 면에서도 으뜸이고요. 얼마 전까지  동물원 시리즈가 핫했으니까. 


어쨌든 다니엘 아샴도 예술성과 화제성을 두루 갖춘 예술가입니다. 조각, 회화, 건축, 영화 등 다양한 작업을 하는 팔방미인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의류 및 가구 브랜드도 가지고 있지만 티파니 앤 코, 디올, 포르셰, 아디다스, 리모와 등 다양한 명품 브랜드와 아티스트들과도 꾸준히 협업을 해왔고요. 


이번 전시는 《서울 3024- 발굴된 미래》라는 타이틀로, 현대 문명과 유적 발굴을 재해석한 그의 작업 세계관인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logy)'을 선보입니다. 전시공간도 색달라요. 다니엘 아샴의 작업 세계관인 상상의 고고학에 맞게 전시장을 발굴 현장처럼 풀어냈거든요. 물론 이 세계관에 부드럽게 젖어들기 위해선 전시장 초입의 긴 터널 공간부터 아샴 유니버스 도표까지 잘 느끼고, 본 후에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야 합니다. 

다니엘 아샴 유니버스. 촬영=네버레스홀리다

다니엘 아샴은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출신입니다. 마이애미의 디자인 건축 고등학교(DASH)에서 건축을 배웠고, 뉴욕 쿠퍼 유니언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어요. 2007년 마이애미에 아티스트 운영 공간인 더 하우스(The House)를 창립한 이후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요.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엔 유년 시절 마이애미에서 경험한 광활한 자연과 인공적인 건축, 남 플로리다를 강타한 허리케인 앤드루(Hurricane Andrew)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합니다. 특히 허리케인으로 폐허가 된 도시는 그에게 인간의 무력함, 자연의 압도감, 문명의 덧없음을 느끼게 했고, 그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자리해  그의 초기작에 자연과 인공,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 형태의 조각과 회화가 자주 등장한다고 하죠.   

전시 출품작 촬영=네버레스홀리다

2010년 루이뷔통 커미션 작업을 위해 남태평양의 이스터(Easter Island) 섬을 방문한 일도 그에겐 결정적 순간입니다. 이때 그의 작업 핵심 개념인 '상상의 고고학'이 착안되었거든요. 당시 발굴 현장에서 작업하는 고고학자와 유물을 보게 되었고, 과거의 유물을 통해 현시점의 역사를 추적하는 고고학자에게 영감을 받아 허구와 팩트로 구성된 역사를 주제로 상상의 고고학이라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들었으니까요. 즉 상상의 고고학은 현재의 일상 물건이 미래에 유물로 발굴된다는 개념이고, 이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지칭하는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업입니다. 만약 그가 이스터섬에 가지 않았거나, 그곳에서 유물 발굴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상상의 고고학'은 아마 더 오랜 시간 후에 등장했거나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소개됐을 수도 있었겠죠. 


전시는 천년 후의 미래인 '3024년의 서울'이란 설정하에 섹션을 구성했습니다. 보고 나면 그다지 크게 관련 없는 제목 같아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상의 고고학이란 세계관을 담아 출품된 250여 점의 작품들은 ‘조각 박물관’, ‘포켓몬 동굴’, ‘분절된 세계’, ‘발굴 현장’, ‘기묘한 벽’,‘드로잉 호텔’, ‘21세기 시네마’, ‘아카이브 스튜디오’, ‘퓨처 스테이지’ 총 아홉 개의 전시 섹션으로 나눠 관람객을 맞고 있죠.  전체 섹션이 유기적이긴 하지만 연대순은 아닙니다.


가장 첫 섹션인 '조각 박물관'은 꼼꼼하게 보셔야 해요. 작품이 여러 점이나 맥락은 비슷해서 앞서 설명드린 개념만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 ‘푸른색 방해석의 침식된 아를의 비너스(2019)’는 다니엘 아샴 작업의 키워드인 ‘시간’의 개념과 상상의 고고학이란 주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죠.  

푸른색 방해석의 침식된 아를의 비너스(2019),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 작품의 원작은 17세기 프랑스 남부 아를의 로마 고대 극장의 폐허에서 발견된 조각 ‘아를의 비너스’입니다. 원작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입니다.  발굴 당시 오른팔이 없었고 왼팔 일부만 남아 있던 걸 루이 14세가 아낀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이 이 조각상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 추정해 왼손에는 거울을 오른손에는 사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하죠.    


다니엘 아샴의 작품은 원작 조각과 크기, 자세, 머리카락 묘사까지 똑같습니다. 이런 정밀함은 박물관에서 공익을 위한 복제품 제작에 쓰는 틀을 제공받아 만들었기에 가능했죠. 그가 화산재나 석고 혹은 모래와 같은 소재들로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점만 다른데,  이들은 그의 작업 핵심인 ‘시간’을 표현하는 기제입니다.  약 3천 년 전의 시간을 대변하는 이 조각상의 몸은 풍화되고 침식되어 시간이 그만큼 흘렀음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 단단한 크리스털과 같은 광물질을 넣어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는 의미도 함께 담았죠.  


그 뒤에 있는 폭 5m의 대형 회화 ‘숭고한 계곡, 스투바이탈(2023)’도 화면 속 시간의 깊이를 추산해 보는 재미가 꽤 있는 작품입니다. 모노톤의 대형 회화 속엔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워즈의 알투-디투와 쓰리피오, 비너스 이탈리카, 그리스 장군 페리클레스, 포르셰 911 터보와 르코르뷔지에 스타일의 건축물이 자리해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티롤에 있는 아름다운 계곡 스투바이탈의 웅장한 풍경과 잘 어우러지죠.   

숭고한 계곡, 스투바이탈(2023)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이 회화에는 시간의 깊이가 얼마나 담겨 있을까 싶은데, 그리스 장군 페리클레스부터 포르셰 911까지의 시간을 역추적하면 이 한 폭의 회화에 담긴 시간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섹션의 작품들은 모두 시간과 함께 역사, 문화, 장소의 경계가 사라진 융합적인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니, 꼼꼼하게 보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하얀색이나 모노톤이 주로 쓰여요. 그가 일반인 기준의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색 인지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죠. 흔히 말하는 색맹(color-blind)으로, 다양한 색채로 작업을 하는 회화를 전공한 그가 조각으로 전향한 이유이기도 해요. 그의 세계적 인기에 7, 8년 전쯤 한 안경 회사로부터 색 보정 안경도 제공받았고, 자신의 세계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색채가 있는 작업도 진행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모노톤 작업이 주를 이룹니다.  사실 그가 겪은 색에 관한 결핍은 ‘상상의 고고학’이란 세계관을 만난 후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요.  

초기작을 모은 전시실. 칼라 작업도 있다. 촬영=네버레스홀리다

귀여운 작품도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포켓몬이죠. 작가는 어릴 때부터 포켓몬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그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리거나 조각했다고 해요. 그걸 우연히 본 포켓몬 원작자가 협업을 제안했고, 2020년 포켓몬 원작 애니메이션 감독 유야마 구니히코와 협업해 포켓몬 세계와 자신의 세계관을 연결하는 에피소드 ‘시간의 파문’을 제작했습니다.  7분 미만의 영상으로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전시 출품작 촬영=네버레스홀리다

포켓몬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아요. 주요 캐릭터가 등장한 포켓몬 동굴부터 애니메이션에 사용된 스케치까지 전시실 가득 포켓몬 천국이니까요. 포켓몬 주인공인 지우 옆에 본인을 그려 넣기도 했으니 성덕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전시실이죠. 포켓몬 작품은 이번 프리즈에도 출품되었는데, 팔렸는지는 모르겠네요.  


한 화면에 고전 조각상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나란히 배치한 ‘분절된 아이돌’(2023)도 그의 작업 스타일을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작업입니다. 고전 조각상,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같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소재는 다니엘 아샴의 주요 작품 요소 중 하나예요. 다니엘 아샴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친근한 소재를 대상으로 작업하며 시간의 영원성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그의 작품 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하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조화를 나타내는 고전 조각상과 대조적인 성격의 현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현재’의 시간을 대비시켰는데, 현재 우리가 즐기는 것들 역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상처럼 몇천 년 후엔 미래 유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이상화된 모습으로 당대의 대중들을 매료시킨다는 공통점이 있는 작품입니다.   

전시출품작=네버레스홀리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구성된 설치 작업인 ‘발굴 현장’은 전시 제목인 ‘서울 3024-발굴된 미래’와 다니엘 아샴의 ‘상상의 고고학’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이라이트 공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후 폐허가 된 서울의 발굴 현장을 실제 발굴 현장처럼 재현했어요.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마치 유적지를 탐험하는 듯 전시작을 둘러보면 되는데, 전시된 발굴 유물은 현재 우리 일상에서 자주 보는 제품들로, 핸드폰, 신발, 카메라와 같이 현대의 일상  물건들이 마치 미래에서 발견된 듯한 가상의 유물로 전시 중입니다.  유물 명칭은 모두 한글을 전혀 모르는 작가가 그리듯 썼다고 해요.  

전시 출품작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이 장소엔 특별한 그림 두 점이 걸려있습니다.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헬멧을 쓴 아테나’와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신격화된 로마 조각상’은 다니엘 아샴이 이번 전시 관람객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신작 작업이죠. 미래의 서울, 북한산에서 서양 고대 조각 유물을 발견한다는 허구적 스토리와 상황을 담아 한국의 관람객을 위한 서사를 제공하지만, 실제로 북한산에 가본 게 아니라 북한산에 대한 이미지를 수집해서 그린 작품이다 보니 대부분의 관람객 눈엔 북한산의 분위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어디엔가 저런 풍경이 있긴 하겠지만, 북한산 풍경 같진 않습니다. 북한산이 워낙 크고 넓긴 하지만, 많은 방문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으니, 그가 다음에 서울에 온다면 그땐 꼭 한 번이라도 북한산을 다녀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신격화된 로마 조각상과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헬멧을 쓴 아테나’. 촬영=네버레스홀리다

‘발굴 현장’에는 이 현대 유물을 직접 그려 보거나 조사서를 작성하면서 발굴 연구원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놓치지 마세요.  

체험 전시실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이외에도 자신이 방문한 국가와 도시에서 영감 받았던 것들을 드로잉으로 남겨놓은 호텔 드로잉 연작, 작가가 좋아하는 영화를 주제로 한 조각, 직접 배우로 출연한 영화, 브랜드 콜라보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출품작 촬영=네버레스홀리다

관람 시간은 그냥 봐도 한 시간 이상인데, 영상 작업까지 다 본다면 2시간 이상으로 생각하셔야 해요.  아, 여기 도슨트 설명이 좋더라고요. 도슨트까지 듣고 작품 보고 영상까지 보려면 3시간 이상은 족히 필요하니 넉넉하게 시간 여유 두고 가보길 바랍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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