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인생의 태態를 지닌 조각,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 (2026.3.17~6.28), 호암미술관, (ft. 옛돌정원 이우환)
봄꽃의 곰살맞은 눈 맞춤이 기분 좋은 요즘입니다.
연일 기온이 오르다 보니 꽃들이 앞다퉈 피고 있는데, 산기슭에 있는 저희 동네는 아직 추워서 그런지 시내만큼 꽃이 피진 않았어요. 늦게 피는 대신 다른 곳보다 더 오래 꽃구경을 할 수 있긴 하지만, 이곳의 여린 잎들도 얼른 살포시 피어 눈 호강을 시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전시는 호암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김윤신 작가 회고전《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입니다. 이 계절과 그 장소에 잘 어울리는 조각 전시로, 4월에 가면 전시 관람은 기본이고 푸른 자연과 봄꽃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거예요.
김윤신(1935년, 원산 출생)은 한국 현대조각 1세대 여성 조각가 중 한 명으로, 70여 년간 나무와 돌을 주 매체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본질이란 주제를 표현해 온 원로 작가입니다. 홍익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공부했고, 귀국 후 조각·판화·회화 작업을 병행했어요. 한국 모더니즘 조각의 발전을 이끈 작가로, 최초의 여성 조각가 단체인 ‘한국여류조각회’ 발족(1974)을 주도했으며, 성신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청주여자 사범대학교 등에서 후학도 양성했습니다.
1955년 홍대 시절부터 현재까지 작업한 작품이 평면과 입체 총 1천5백 점에 이른다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망실된 1960년대 이전 작품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초기작인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 판화와 이후 실험적인 평면작품들부터 현재까지의 작업 중 선별된 17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2023년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전시를 시작으로 근 몇 년 김윤신 작가 전시가 여럿 열렸는데, 현재 호암에서 진행되는 전시 규모가 가장 큽니다. 회고전이라 작가의 작업 세계와 그간의 작업을 톺아보기도 더할 나위 없고요.
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층 전시실에선 초기작인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지의 나무 조각 및 평면 작품을 선보입니다. 작가의 이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83년 한국을 떠나 아르헨티나에 정착해 만든 작업물로, 전기톱을 사용해 조각한 남미 나무 조각의 원시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이때의 작업들도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작업 이념이자, 작품 시리즈 제목, 전시의 부제인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작가와 재료가 하나가 되어(合) 작품이라는 또 다른 하나가 탄생(分)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작가는 조각 전 나무를 오래 살피고 그 안에서 형태와 공간 분할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렇게 직관적 통찰을 통한 작업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다양한 외피와 덩이를 지닌 자연물 조각이 되는 거죠. 1층 전시실 끝 영상실에서는 20여 분 길이의 작가 및 작업 소개 영상이 상영되는데, 구순이 된 지금도 전기톱을 들고 작업하는 작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조각할 나무를 찾아 서울에서의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아르헨티나로 옮길 결심을 한 후 작업을 통해 2008년 ‘김윤신 미술관(Museo Kim Yun Shin)’ 설립 등 현지에서의 현재의 성과를 이뤄낸 그의 결단과 뚝심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이었어요.
작가의 나무 조각은 볼 때마다 사람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사실 사람이 아니더라도 SF 영화를 통해 보아 온 다양한 생명체들이 있어 나무 조각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캐릭터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나무'라는 동일 매체를 사용했지만 조각 방식, 나뭇결, 색상, 크기, 굵기 등의 차이가 동일 매체를 얼마나 다르게 보여주는 지도 확실히 알게 되고요.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다른 형태가 무한히 발견되어, 저는 전시장을 천천히 여러 번 돌고 나왔어요. 발견하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2층 전시실에서는 작가의 돌조각과 2000년대 이후 다채롭게 전개된 나무 조각 그리고 회화 작품을 선보입니다. 작가는 198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브라질과 멕시코의 오닉스(onyx)와 준보석 등을 사용한 돌조각으로 재료로 작업을 확장했어요. 이 작업이 2층 전시장 초입에 있습니다. 보기엔 너무 예쁜 돌이지만 원석을 다듬어 현재의 모습까지 만드는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다는 건 굳이 부가 설명이 없어도 알겠더라고요.
2층에는 작가가 2000년대 초기부터 조각에 사용한 아르헨티나 원주민 마푸체(Mapuche) 부족의 색채와 문양이 담긴 작품도 전시 중입니다. 색채와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이국적인 모습과 시각적인 변화가 도드라지지만 개인적으론 채색을 하지 않은 조각 작품이 더 와닿긴 합니다. 물론 작가가 말했듯, 채색을 한 것도 하지 않은 것도 다 제작 이유와 존재 가치가 있죠.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은 2층 마지막 전시실입니다. 원목과 채색, 회화 작품이 너른 공간에 일렬로 놓여있어요. 확 트인 공간에 가지런히 정렬된 모습이 개성 가득한 각각의 생명체 같았고, 작가의 최근 작업 스타일이 정리되는 공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출품 작품은 2층 전시장 외부에 설치된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입니다. 이 공간은 원래 휴게 장소로, 작품이 없어도 통창으로 보이는 자연 그 자체가 작품이라 명상하기 좋죠.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은 최근작이지만, 작품 제목에서도 보이듯, 2013년 작 나무 조각을 알루미늄으로 캐스팅한 뒤 아크릴 채색을 더한 작품입니다. 작가가 ‘회화-조각’이라 명명하며 새롭게 몰두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작업 중 하나라고 합니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확장하는 작품이라고 하니 놓치지 말고 보세요. 참고로 역광이라 사진을 찍으면 색이 잘 보이지 않으니 통창을 등지고 찍으셔야 해요.
저는 호암미술관에 갈 때 리움-호암 왕복 셔틀을 이용합니다. 전시를 예약해야 셔틀을 이용할 수 있어요. 이 전시를 보러 갈 때도 셔틀을 탔는데 셔틀 탑승 시간이 변경되었더라고요. 예매 확인 역시 셔틀 탑승할 때 진행되고요. 오전 셔틀을 타면 관람 시간이 30분 더 여유로운데, 9시 30분에 리움에서 출발해 10시 10분 정도 도착 후 호암 출발 시간이 오후 1시이니, 호암 카페와 굿즈 숍 이용도 가능합니다. 보통 본관 전시 관람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되는데, 저는 남은 시간 동안 지난번 못 봤던 옛돌정원의 '이우환'작가의 작품을 봤어요. 2025년 10월 말에 공개된 이우환 작가의 신작 상설전은 전통정원 '희원'과 '옛돌정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희원'에는 <실렌티움(묵시암)>이, 호수 주변 '옛돌정원'엔 조각 3점이 설치되어 있죠. “조용한 눈길로 만나는 공간”인 <실렌티움(묵시암)> 의 실내 작품 3점과 야외 설치 1점은 지난 '루이즈 부르주아' 포스팅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옛돌정원은 너른 호수를 마주하고 있는 낮은 구릉지 산책로입니다. 주차장과 가까워서 셔틀을 탔다면 내렸을 때 먼저 보거나 셔틀을 타기 전에 보면 동선이 효율적이에요. 언제 가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장소로, 피크닉 장소로도 아주 좋죠. 옛돌정원에서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지름 5m의 스테인리스 스틸 링 구조 조형물인 〈관계상-만남(Relatum-The Encounter)〉입니다. 아직은 미완으로 링 양쪽에서 마주 보는 두 개의 돌이 더해져야 완성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에 반사되는데, 그 느낌이 참 좋더라고요. 주변을 흡수하는 거 같기도 하고 반사하는 거 같기도 하고 산업물로 만들어졌지만 자연물 같은 이질적이지 않은 작품이죠.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인상'이 변화무쌍하고요.
낮은 구릉을 따라 오르면 중턱에서 스테인리스 스틸과 돌로 구성된 〈관계항 – 튕김(Relatum-Bursting)〉을 만납니다. 곡선형 스테인리스 스틸과 두 개의 자연석이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는 작품으로, 1970년대에 흔들리는 얇은 철판으로 형태를 구상했던 것을 두꺼운 재료로 다시 구현했어요. 팽팽하게 고정되어 있던 한쪽이 풀리면서 그를 지탱하던 돌이 밀려난 형상이죠.
<관계항〉시리즈는 돌과 철판, 유리 같은 이질적인 재료를 결합해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인위적인 구성을 지양하는데, 저는 이 관계항 시리즈를 볼 때마다 작가의 예술철학처럼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라는 말을 체감하게 됩니다. 보이는 대상이 단순해질수록 담기는 것들이 많아지긴 하니까요. 그게 주변 자연물일 수도 있고 관람자의 생각일 수도 있겠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역학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요. 이 작품에서도 대상이 의인화되는 시각적 경험을 했는데, 한 각도에서만 보지 마시고, 한 대상에만 집중하지 마시고, 가깝게 또 멀게 다양한 거리와 각도에서 보시면 작품의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옛돌정원에 설치된 이우환 작가의 마지막 작품은 〈관계항-하늘길(Relatum-The Sky Road)〉입니다. 호숫가 주변에 놓인 작품으로, 20m의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과 돌로 구성됐어요. 다른 작품에 비해 좀 얼룩져있는데, 거울처럼 반사되는 작품 표면에 비친 하늘과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늘 위를 걷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놓인 곳 가까이 별도의 스테리스 설치 작품은 없지만 하얀 돌이 깔린 구간이 있습니다. 이 역시 설치작으로, 주변과 잘 어울릴듯해서 미술관에 요청했다고 해요.
우리나라에는 좋은 공간들이 많습니다. 호암도 그중 하나죠. 이 계절에 가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 작품 감상도 하고 자연친화적인 공간에서 일상의 피로도 해소하고 오세요. 입장료가 싸진 않지만 그 이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