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현
나에게 감정은 주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일상에서 배제되고 배회하는 감정에 매료되는 순간, 스케줄은 중단된다. 경보음이 울린다. 환청이 아니었다. 삼광사의 영가가 나를 부른다는 미친 여자는 경찰관에게 끌려 나가지만, 일상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세계의 명령은 아무도 끌어내릴 수 없다.
먹어도 좋고 마셔도 좋다. 일해도 좋고 여행해도 좋다. 정의를 위해 싸워도 좋고 가족을 위해 비굴해도 좋다. 그러나 슬퍼해서는 안된다. 슬픔은 이 세계가 거대한 거짓말이 아니었나, 하는 진실을 깔고 앉았기 때문에. 환청도 함께 들으면 환청이 아니고, 우리 모두는 정신병이 아니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돌아보면, '왜 감정을 참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감정은 악하다'라는 명제였다. 아무리 질문해도 나는 생겨 먹은 대로, 감정의 바다에서 멀미하듯 존재한다. 죽지 않는 한 이 멀미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데, 이미 존재하는 것에 세계를 덧씌워서 이른 곳이 죽음이라면, 혹은 소외되고 배제된 곳이라면, 애초에 질문이 협소했던 것이 아닐까.
존재는 선택이 아니고, 존재의 근거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슬픔은 해야 한다, 혹은 말아야 한다,는 당위의 영역이 아니다. 단지 거기 있다. 그 진실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이 책은 슬픔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하려는 책무를 지고, 슬픔의 효용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다.
슬픔은 불능을 역능으로 전환한다. 역할을 다하라는 세계의 명령에 대한 '수행-불가능', 가만히 있으라는 세계의 명령에 대한 '순응-불가능'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처럼 탈진한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경험한 진리를 기어코 공적으로 구현하기를 갈망하는 자, 상실의 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야트막한 욕망으로 슬픔을 봉합하지 않는 자, 생존에 유리한 세계의 구조물에서 떨어져 나와 방황하기를 선택한 자, 그에게 슬픔은 세계의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역능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의 해명이라니, 백상현 교수님의 언어가 좋다.
ㅡ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전자책
#백상현
- 철학자는 개별적이던 진리의 언어를 보편적인 영역에서 재해석한다.
- 진리는 언제나 새로우며, 언제나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
-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을 변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플라톤이 썼던 거의 모든 작품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형식을 취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구 철학은 그렇게 진리 상실의 슬픔에 대한 기나긴 애도의 절차로서 시작되었다.
- 철학을 진리에 다가서도록 만드는 것은 슬픔이다.
- 슬픔이 끝은 아니다. 슬픔 다음에는 조난이 온다. 누군가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상실을 슬퍼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이미 길을 잃고 방황을 시작한 것이다.
- 라깡은 자신의 임상이론을 통해 시간은 결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을 한 편의 여행처럼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여정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반복되는 시간의 정지된 속성을 은폐하는 가장 기만적인 환상이라고, 사실 우리의 욕망이란 타자에 의해서 결정된 이후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는 도돌이표 운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삶 속에서 만나는 세계의 무한한 이미지는 이미 결정된 욕망의 루틴이 반복되는 것을 숨기는 일종의 신기루였다.
- 슬픔은 상실을 표지하는 맹목적 정동이다.
- 애도는 슬픔의 감정을 언어로 사로잡고 상징화하며 그것이 가진 병리적 긴장을 해소하려 한다.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언어는 상실을 경험하는 주체가 동의할 수 있는 언어, 즉 권위 있는 보편적 언어여야만 한다.
- 슬픔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애도 작업은 슬픔을 보편적 언어로, 고정관념의 언어로 분절하고 포획한다. 그리하여 슬픔의 모호한 정동은 말속에서 설명되고, 그것이 가진 병리적 힘을 상실하게 된다.
- 애도란 공백의 출현에 대한 자아의 방어
- ...진리를 위한 방황의 조건은 단지 속견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 상처와 그로 인한 슬픔의 가치를 믿는 신념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믿지 않는 것만으로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시작될 수 없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주의는 현실을 수용하고 그 권위에 굴복하는 패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 그럼에도 슬픔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증상적이다. 진리의 상실을 표지하는 증상으로서의 슬픔이다. 어떻게 해도 소멸되려 하지 않는 슬픔은 공동체가 의지하는 언어 능력의 임계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슬픈 이유는 그것을 위로할 언어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주체들의 투쟁은 우리 공동체의 언어가 표현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드러낸다.
- 라깡에게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란 우리 자신을 뒤흔들면서 원래 자리했던 위치로부터 뿌리 뽑힌 채 떨어져 나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방황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역능을 소유한다. 라깡은 카타르시스를 이러한 역능을 조기에 차단하는 거세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 슬픔이 겨낭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었으며, 그렇게 흔들리는 존재는 자아에 관련된 거짓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던 자아는 사회적 고정관념과 타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진리는 추구되는 것이지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미 찾아냈고 실현했다는 믿음 속에서 진리의 추구를 멈추거나 소홀히 하는 순간 진리는 소멸해버리고, 환상이 대체될 것이다. 정의와 같은 진리의 대상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찾아 나서는 투쟁의 동사적 절차 속에서만 유지되는 특수한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미 확보했다고 믿는 순간 진리는 즉각적으로 과거의 개념이 되어 권력화 되고 이데올로기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