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
알 수 없는 것에 너무 오래 붙들려 있지 말아야 한다.
삶의 의미, 타인의 마음, 다가올 미래, 왠지 모를 우울감 같은 것들.
질문하고 고민하고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봐야 모두 헛소리다.
요 며칠 내가 생각한 이유들도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이제껏 살아오며 축적한 고정관념의 논리구조를 완성하려는 좌뇌의 거짓말, 아니면 기질과 우연으로 이리저리 배선한 욕망의 회로,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욕구와 호르몬 등이 이리저리 배합된 망상이 아니었을까.
물어본들 답은 없다.
그 답 또한 내가 던진 말에 필연적으로 동반된 오해와 답변자의 고정관념, 그리고 욕망의 회로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허구일 뿐일 테니.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리다 출근했다.
쏟아지는 신고를 처리하며 그간 찾아냈던 우울의 이유들이 하나같이 다 헛소리가 아니었나 비로소 의심했다.
날씨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 전체가 이토록 신음할 리가 없다.
죽는다는 사람, 미친 사람, 정신 줄 놓은 사람, 몇 번이고 전화해 국가보안법 위반 죄를 묻거나 같은 말을 수시로 반복하는 사람 모두,
살결에 느껴지는 불쾌감을 해소하고 싶어 나를 찾는 것 같았다.
버려진 창고에서 언제 나간 지도 모르는 치매환자를 찾으려고 cctv를 돌려 보고, 골목마다 누비며 cctv를 찾고, 차 몰고 도망간 조현병 환자를 추적하고, 번개탄 피운 남자를 찾고, 연락 끊긴 배우자를 찾고, 결혼 파투내고 떠난 남자를 찾고..
한 사람을 찾으려는 계획은 시시때때로 나를 침해하는 다른 신고에 의해 정지되고,
나는 컴퓨터와 무전기와 전화기와 휴대폰을 옮겨 다니며 모든 침해에 나를 방어할 기제 따위는 없이 국민에게 노출된 채 신속하게 계획하고 정지하고 조치하고 다시 시작한다.
물론 국민은 나의 상황을 이해할 의무가 없다.
당장 딸을 찾지 못한다고 질책하는 전화를 하다가 찾아와서 넋두리를 늘어놓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3명의 실종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지연돼도,
실종자를 찾는다는 문자에 항의전화를 하는 동안 다른 모든 업무가 마비돼도,
온전히 나의 책임이다.
나는 나의 상황을 읽고, 나의 감정을 추스르고, 국민의 욕망을 읽고, 그들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언어를 발견하는 동시에,
동료들의 반응, 상부의 시야, 법과 매뉴얼과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 실종자를 빠르게 찾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현장에서 흔적을 찾고 사무실에서 공문을 만들고 시스템을 조작하는 그 4시간 동안 60통이 넘는 전화를 했다.
무전기에서는 쉴 새 없이 나를 불러댄다.
상부에서는 현장 상황을 묻고 또 묻는다.
1층에서는 민원인이 기다리고 그들은 하나하나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내게 쏟아낸다.
밤늦도록 배는 채우지 못했다.
포식자에게 쫓기는 기분이 든다.
나는 언제나 이 혼돈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혼돈에 주눅 들면 살아야 될 이유란 영영 없다.
그래서 나는 죽지 않으려고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문화문법과 인간의 무의식을 해석하고, 불편한 감정에서 삶에서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자기 자신과 세계가 공명하는 언어를 발견하여 '자기 결정'에 이르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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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p20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사유 면에서 아무런 내용도 없이 오직 잡설에 불과한 문장들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p22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내적 구조까지 변경하는 과정+ 무의식적인 것을 언어로 나타냄으로써 의식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
= 자기표현 과정을 통해 개인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p23 일단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화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의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p23 우리가 감정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26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돼서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p28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립니다.
p29 문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법입니다.
p30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p36 타인의 판단 = 자아상을 점검하고 자기 인식에 새로운 전환을 선사하는 계기 + 타인은 언제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61 분위기라는 것은 하나의 작품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그처럼 작가의 영혼을 잘 나타내주는 것은 없습니다.
p68 기억이 휘두르는 전횡을 막는 방법은 오직 자기 인식뿐입니다.
p69 어떤 힘이 나를 조종하는지 알아내지 않으면 사물을 바꿔볼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아요.
p70 자신을 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떠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는 것이지요.
p96 문화적 구조 = 우연히 우리에게 닥쳐와서 영향을 주고...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거닐지요.
p97 자신에게 주어진 문화의 문법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더 큰 문맥에서 이해하고 나면 그 문화가 복수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과 투명성이 확대될수록 내적 자유도 확대되어 맹목적으로 각인되었던 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