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현
세계는 본질적으로 혼돈인다. 인간은 혼돈에 환상을 덧입혀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환상의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타자'라는 거울에 반영된 자신의 이미지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동반한 환상적 자아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이 폐쇄된 자아상 속에서 선악의 고정관념이 허락한 얕은 쾌락조각을 핥으며 타자의 욕망을 반복할 뿐이다.
이때, 불투명한 사건이 인간을 매혹하면 환상구조에 균열이 나고 인간이 변한다. 매혹적인 사건은 혼란스럽다. 도무지 기존의 지식, 고정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혼란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환상 아래의 공백을 마주하고 허무에서 창조로 나아갈 수 있다. 그 고독의 절차와 과정이 바로 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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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의매뉴얼 > #백상현 (전자책)
74 아이에게 부모의 욕망이란 하나의 거대한 구멍 또는 공백과도 같은 형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아니라, 무언가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에도 질서가 부여되지 않은 카오스로서의 구멍. 블랙홀과 같은 공백 말이다. 바로 이러한 공백에 대한 아이의 반응이 근본환상으로 구성된다. 아이는 부모의 욕망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하나의 시나리오를 구성해내고 그것을 근본환상으로 간직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아직 초자아의 검열을 발지 않은 시나리오이다. 이것은 아이가 블랙홀과 관련하여 자신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도덕적 질서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하여 출현하는 것이 최초의 시나리오에 대한 왜곡이며, 이것이 아이의 이후의 삶을 지탱하는 논리가 된다. 이와 같은 환상들, 억압을 야기하는 환상과 그 억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근본환상 모두는 아이의 충동과 상실의 자리인 공백의 관계로부터 야기되는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환상은 주체와 공백의 긴장 관계 속에서 출현하는데, 이러한 출현에는 어떠한 보편적 범주론도 적용될 수 없다. 모두의 환상은 모두의 개별적 역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76 원인은 공백이며, 바로 그것과 주체가 대면하는 것이 중요한데, 라깡은 이것을 '환상의 횡단'이라고 부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nothing'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무언가의 지식에 의존하여 공백을 대면한다면, 공백은 그것의 비존재적 속성으로 인해 주체가 의존하는 지식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95 존재의 질서는 쾌락-현실원칙의 질서
95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지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의존하는 경향을 따르고,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계에 갇힌다.
100 사건은 매혹을 통해서 주체를 사로잡아야 하고, 그러한 매혹은 모든 것을 바꾼다.
100 매혹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태양 빛의 투명함을 출현시키는 담배연기처럼, 혹은 먼지처럼, 자신의 불투명성을 통해서 진리의 투명성을 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비록 오인의 형식일지라도, 진리를 전달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든다.
105 바디우에 따를 때, '사건의 자리'가 발생하는 것은, 세계의 안정된 질서-구조가 비틀리는 순간이다. 이때 현존 지식은 더 이상 삶의 변화들을 설명하여 상징화시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의 자리는 균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껏 선명하게만 보였던 삶의 질서가 하나의 미스터리처럼 불투명해지는 순간, 우리는 사건의 자리가 형성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의 벌어짐은 언제나 다시 봉합될 운명을 가진다. 사유의 이 같은 방어적 경향에 의해서 다시 페쇄되는 사건을 구해내는 것이 주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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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단계: 인간의 심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의 통일성을 획득하는 첫 번째 단계
이 같은 거울 단계의 은유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울 보는 아이가 의존하는 타자의 개념이다.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가 하나의 '정당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부모 또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다른 어른의 보증 속에서만 확신할 수 있다.
164 우리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고정관념이라는 타자의 시선의 의존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242 타자 역시 거울상의 오인 속에서 타자의 타자의 욕망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이며, 그러한 반복은 끝없이 다시 반복되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기 인식과 세계 인식은 거울이라고 은유될 수 있는 타자-의존적 반영 이미지들의 폐쇄 공간에서 출현하는 환상의 구조를 갖는다.
243 정체성이란 이와 같은 환상-구조물 내에서 타자에 의해 결정된 오인의 산물에 불과하다.
244 세계는 환상 극장이다. 세계는 방어적 욕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들이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러한 이미지의 통제된 나열들일 뿐이다. 그 너머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된 실재를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혹은, 아무것도 없음이, 없음의 방식으로 있기 때문이다.
248 선악의 기준이란 부모의 말 속에서 출현하는 욕망의 흐름이 만들어낸 신기루, 고정관념의 응고물들에 불과하며, 이것은 근친상간적 욕망 또는 조건 없는 욕망, 즉 주이상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원초적 금지의 산물이다.
247 그렇게 해서 세계는 오인과 거짓말에 근거한 표상들의 극장이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표상들은 견고한 질서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세계의 이미지들은 상징계의 틀 속에서 현재의 지배적 담론을 구성하는 지식에, 쉽게 말해서 고정관념의 권력에 완전히 장악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아는 만큼만 세계를 보며, 우리의 앎을 지배하는 것은 지배적 담론들, 고정관념들이다.
255 주체는 그러한 진리의 순간에 매혹당함 자체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실체로서의 주체란 없다. 우리의 의식 상태 중에서 가장 주체에 가까운 것은 어떤 주체성의 환영에도 자신을 개방하지 않는 완고한 고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면 고정관념에도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노력. 세계를 의미의 공백으로 유지하려는 투쟁. 주체의 개념은 그것에 아주 가깝다. 그럼에도 저항 자체가 주체는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워내기 위해 이미 어떤 종류의 지식을 사용하고 있으며(예를 들면 라깡의 이론이나 바디우의 철학), 따라서 이미 타자의 지식에 종속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주체는 의식적 상태라기보다는 현재의 지식을, 고정관념을 흔들고 균열을 생산하는 사건에 매혹당하는 절차들, 그리하여 그러한 절차에 참여하는 자아의 자기 망각과 같은 것, 그러한 과정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