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공무원들에게

젊음이 고통스러운 이유

by 김반장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오래전 일 같다.


심심찮게 젊은 공무원들의 비보가 들려와 마음이 아팠고, 비참하거나 허무한 죽음을 몇 번 구경했다. 업무 상 매일 누군가가 죽거나 죽을 뻔한 사건들을 보고 겪는데도 매일 마음이 아프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으로 박제된 순간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 그들의 고독했던 죽음의 순간은 낱낱이 고발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서 부스러져 나오는 구질구질한 먼지들도 그들을 죽게 했던 이유 같기만 하다. 그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대부분의 죽음이 그러하지만, 특히 내가 보는 죽음은 마음껏 애도받지도 못한다.

그들의 사인은 공공연한 비밀로 부쳐지고, 가족들은 수치심에 고개를 숙인다. 가족들의 탓은 아니지만, 또 누군가는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느니 '가족들은 왜 몰랐냐'느니 '어쩐지 와이프 또는 남편 성격이 장난이 아니었다'라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 비난의 조각에 일조한 사람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하므로, 우리 모두가 그 말의 주체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의 삶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끊어져 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생이 살아남은 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드라마가 될 때에만 하나의 에피소드로 나타날 수 있다. 정작 그들을 살게 했던 자잘한 생의 흔적들은 포말처럼 부서져 사라진다. 그들이 먹고, 입고, 살았던 시간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에서 철저히 부정된다.


어떤 때는 거부의 의미로서의 부정이 아닌,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철저히 부정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가족들의 아픔은 어쩌라고 저러는지, 그 어리석고 철없는 영혼들에게 감히 혀를 찬다.


그러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다른 이들보다는 자주 그 철없는 '선택'들을 보아온 나는 그들이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죽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그러하고, 죽은 이들에게 죽음 말고 달리 '선택지'가 있었는가,라고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제 영화 '박화영'을 봤다.


박화영의 자취방은 가출청소년들의 왕국이다. 박화영은 그들에게 '엄마'라 불리며 조건없이 집을 내주고, 죄도 대신 뒤집어쓴다. 그녀가 부자연스럽게 반복해서 내뱉는 말, "너희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엄마'로서의 자부심 다름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그들의 노예나 다름없지만, 그 댓가로 '엄마'라는 희생의 아이콘은 남았다. 이로써 박화영이 그토록 원했던 '박화영의 엄마'는 비로소 세상에 존재한다. 그녀가 홀로 떠돌면서 투신이라도 할 듯, 교량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도 이내 침을 뱉어 버릴 수 있는 건 그 자부심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찝찝하고, 기분이 나쁘다. 특별히 화려하게 잔인해서라기보다, 그저 신랄하게 현실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 감히 내가 어쩌지 못할 거대한 고통을 마주했을 때, 그 고통의 미로 속에서 아드리아드네의 실타래에서 삐져나온 한 가닥 실도 보지 못할 때, 인간은 눈을 감는다. 그 고통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진부한 훈계로 봉합해 놓고 그 고통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그냥 산다. 그래도 이미 보고 듣고 겪은 나의 삶이 '이건 진짜야. 진짜라고.'하고 진동하는 탓에 기분이 울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박화영의 삶은 가난하고, 외롭고, 아프고, 부당하다. 짧게 자른 머리로 여전히 청소년들을 먹이고 재우는 박화영과 달리 '엄마'인 그녀를 짓밟고 살인자로 내몰았던 은미정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세련되게 차려 입고 반갑게 미소 짓는 은미정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억울한 내 청춘 돌려내라고 포효하며 패대기쳐도 모자랄 판에 박화영은 반갑다고 또 웃는다. 이거 정말 뒷목 잡게 하는 영화다.


그러나 누가 그녀를 욕할 수 있겠는가. 굴욕을 당해도 상처 받지 않은 척 다시 살고, 억울하게 이용당하고도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해 다시 살고, 가난해도 그냥 살고, 외로워도 살고,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도 모른 채로 또 살아가는 게 세상 대부분의 인간인데, 박화영이라고 유달 시리 달리 살 수 있겠는가.


때로 인간은 죽어야만 할 것 같은 수만 가지 이유에도 살고, 살아서 누릴 것이 남아 있어도 죽는다. 어느 응급실 의사가 책에 적었던 말처럼,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이고, 죽음은 뜻하지 않게 온다. 죽으려면, 살려고 기를 쓰고 애를 써도 죽고, 살려면, 생각 없이 빌렸던 연필 한 자루에도 산다. 누군가는 우연히 권력자의 욕망과 맞물려 살고 그 사이에 누군가는 무관심 속에 죽는다.


요즘 세상에는 죽기도 쉽지 않다. 잠시 연락이 끊겨도 경찰이 출동해서 샅샅이 찾아내고 헬기를 띄워 야산을 뒤진다. 죽을 지경까지 갔어도 신속한 구급차와 실력 있는 의사들이 또 살려 낸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며 심폐소생술을 받고, 목구멍이 찢어지며 기도 삽관을 받고, 의식이 없어도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농약으로 녹아버린 식도는 새로이 관을 끼워 넣고 부러진 뼈와 찢어진 살점은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 있는 중에 다시 붙을 것이다.


인생은 진정 팔자소관이다.


인간의 죽을 이유, 살 이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시도'할 수는 있어도 죽음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죽고 싶은 마음에 압도된 사람에게 죽음 외에 '선택지'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철없는 영혼에 혀를 차는 이들이 말하듯 배부르고 등따신 오늘에 죽을 이유가 없다면,

그저 오늘 하루가 고통스러운 이에게 살 이유도 없는 것이다.


고통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물속에서 바닥을 찾으려 버둥대고, 흘러가는 뗏목이라도 잡을까 허우적댈 때는 뱃 속에 창자가 '살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지, '내가 바다 안에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를 바다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두꺼운 유리창 안에서 멀리 넘실대는 바다를 보며 관망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떠한 연유로 발을 헛디뎌서, 아니면 무심한 이들이 자기 살자고 떠미는 바람에 어둡고 깊은 고통의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살고 싶다'는 마음에 자신만 아는 여러 시도들, 때로는 공감받지 못할 병리적인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런 시도들을 허우적 대다가, 마지막 끈이 끊어지듯 한 순간에 '툭' 죽음을 감지한다. 그 죽음은 신이 내린 계시처럼 오기도 하고, 힘겹게 내쉬던 마지막 한 숨의 기력도 빨아들이듯 서서히 오기도 한다. 그때가 오면 인간은, 다급하게 산을 오르거나, 폐가로 걸어 들어가거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어떤 이들처럼 똥오줌으로 칠갑을 하더라도 기꺼이 그 자리에 누워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박화영은, 아이들의 운동화에 밟히고 뱉었던 침을 다시 먹고 자신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내주고서라도 죽지 않고 살았겠지만, 자신이 누구에게도 '엄마'가 되지 못한다면 '툭'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겉에서 보면 다들 비슷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통의 풍경은 구질구질한 일상의 서사에서 아주 작은 일부분만으로 전시할 수 있기에, 박화영이 죽는다 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고통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다. 그 깊이는 나만이 체험할 수 있고 박화영이 침을 뱉듯 뱉어내는 단어 몇 개로는 절대 표현될 수 없다. 표현될 수 없기에, 아무리 열심히 설명한다 한들 그 고통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고통 밖에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아주 잔인하다. 고통을 관망하는 자들에게 그 고통은 당연히,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지나고 보면 그렇다.


고통에서 한 걸음 물러선 그때, 다시 보인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나를 고통 속에서 구원해준 것은 오직 사랑이다.

고통이 선생일 때도 있다.


나는 그 고통의 바다를 무사히 지나 뭍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예전 이야기를 할 때면 가슴이 욱신거린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뉘앙스나, 조직생활에 대해 조언이라도 들으면 밤새 그 생각만 한다. 내 인생에 난 생채기가 부끄럽고, 나는 왜 이리 나약한지 화가 난다. 가끔은 나 말고는 다들 '은미정'처럼 아무 일 없었던 듯, 세련되게 살고 있는 것만 같아 혼자 엉엉 운다.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인생이 어디 있던가.

자세히 보면 아프지 않은 인생이 없고, 우연히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인간도 있지만 어김없이 오는 아침이 두려운 사람들도 있다.


상처 받은 마음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내가 그 부당한 고통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처럼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독서모임을 하게 되었을까?

지금의 인연을 만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었을까?

글을 썼을까?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달리 생각하면 굳이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몇몇 타인의 생각 없는 말에 내 인생 전체를 반성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은 정신적 결벽증의 나라다. 옳든 그르든, 오점에 관대하지 않다. 특히 타인에게 그러하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알지 못한다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들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내뱉은 고백에 다시 겨우 지나온 고통의 바다에 다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어쩌면 이 의식적인 해명의 순간도, 내가 '운 좋게' 그 고통의 바다를 건너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통은 운 좋게 살아남아 그 고통을 지나왔을 때만 비로소 선생이 될 수 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일 수 없고 몇몇 고통은 모르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도 이왕 겪은 바라면, 없었던 듯 살 수도 없다면, 그 고통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짙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나 할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이다.




한동안 몇몇 젊은 공무원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언론보도로 떠들썩했다.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출근하자마자 강에 뛰어든 사람도 있고,

젊고 예쁜 데다 그 어려운 시험에 통과했던 명석함에 유명세를 탔던 사람도 있었다.

업무량이 많기로 소문난 소관 부처에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사람도 있고,

은밀하고 비정한 조직의 텃세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였다.


나는 생각지 못한 우연과 인연으로 살아남았지만, 죽음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젊은 공무원들은 한순간의 당락에 사활을 걸고, 고작 한두 문제에 자신을 미워했다가, 하얀 종이와 100개 남짓의 문제와 단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인생 전체를 평가받는 수모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깎고 깎아 국가와 주변의 기대와 세상의 순리에 순응하여 세상에 속하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는 단절과 소외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공무원증은, 어두운 고시원 방에 젊은 혈기를 내어 주고 얻은 세상의 입장권이었다.


세상에 입장하자,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기어코 오지 않을 크리스마스와도 같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의 크리스마스엔 전쟁이 끝날 것이라 믿었던 수용자들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우수수 죽어 나갔다. 인생이 나아질 거라는 아주 작은 믿음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가난하고 외로운 젊음을 견뎌온 이들에게 새로운 고통의 형상들이 임계치를 넘었을 때,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까. 단절 속에 고통을 구겨 넣고 먹고 자고 싸는 인간의 당연한 욕망을 싹둑 잘라가며 살아남았던 젊음이, 달리 할 수 있었던 것이 과연 있었을까. 참고 참다가 한 마디라도 새어 나올라 치면, 그들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나약함'을 탓할 것이고, 그들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철없음'을 탓할 것이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불한 '젊음'을 안타까워할 테고, 그들 자신도 싹둑 잘라버린 열망을 다시 찾을 힘이라고는 없었을 텐데,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을 기다리는 건 그들에게 익숙했던 그 고시원 방의 쩍 벌린 아가리와 다름없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조차 시기했다. 다른 사람들도 매일 죽어 나가는데, 공무원이 무슨 벼슬이길래 죽음까지도 크게 보도하냐며, 기레기를 탓했다. (참고로 나는 기레기라는 말이 싫다. 누군가를 혐오해서는 세상에 나아질 것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말이 맞다. 그들의 죽음은 대단치 않다. 하지만 일부 사실인 그들의 말이 오롯한 진실은 아니다. 죽음까지 시기하는 그들은 분명 무엇을 잊고 있다. 세상에 대단한 죽음 따위는 없지만, 살릴 수 있었던 아까운 죽음은 있다. 세상이 떠들썩한 것은, 멀쩡한 줄 알았던 세상이 놓쳐버린 아까운 생명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모두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에, 유별나게 굴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아까워서,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살면서 한 번 웃었던 순간이 아깝고,

당신이 맛보았던 작은 설렘이 아깝고,

당신이 누렸던 순간의 기쁨이 아까워서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싶다.


기왕 태어난 거 조금만 더 살아보면 안 되겠냐고,

하루만 더 살면 밥 한 끼는 사주겠다고,

내 그릇에 대단한 짓은 못해도, 딱 3시간은 군말 없이 당신 얘기만 들어주겠다고,

아니면, 엉엉 우는 당신 곁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어 주겠다고,


내가 듣기에도 참으로 거지 같은 말이지만,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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