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우리 반에 '바보'가 있었다. 어눌한 말투와는 달리 큰 키와 주름진 피부 때문에 '사실은 대학생이다'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만지면 더러운 어떤 것이 묻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것이 단지 놀이였는지, 지나친 상상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담임선생님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목말랐던 자유도 이내 지루해져 아이들은 어슬렁거리는 들개처럼 그 아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배회는 일부러 그 아이의 비위를 거슬러 화를 내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광기 어린 처벌의 축제를 벌이기 전 그 아이의 눈물 젖은 포효를 점화하는 그런 의식이랄까. 그 날따라 아이들의 광기는 제 스스로는 절대 멈출 수 없는 어떤 힘이었고, 이를 본능적으로 느꼈던지 그 아이는 결국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후 옆 반 선생님이 찾아와 이 아이가 교실 밖에서 울고 있는 영문을 물었다. 아이들의 머뭇거림 너머로 늘 있어왔지만 보이지 않았던 거짓말의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불씨에 물을 끼얹듯, 한 아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몰라요. 그냥 나가던데요?'
선생님은 교실을 한 번 쓱 둘러보더니 얌전히 있으라는 충고를 남기고, 떠났다.
언젠가 다시 시작될 그 축제는 느슨하게 봉인되었다.
나는 그게 서러워 집에 가는 내내 엉엉 울었다.
내가 그 선생님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세월이 지나면 명확해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혼돈 한가운데 있다. 완전히 해결해주지도 못할 바엔 모른 척하는 게 맞는 걸까, 세상은 원래 그런 거지만 몰래 위로라도 해주는 게 나은 걸까, 아니면 내가 아예 두려운 존재가 되어 완전한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져서는 자꾸만 판단을 유보하고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었다.
정인이 사건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그 경찰관들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어찌했을지 알 수 없다. 내가 언제나 그들과 달리 떳떳했을 거라 확신할 수도 없다. 내가 그 업무의 고충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때의 상황을 모두 아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옳다고 여겼던 일이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잘 모른다'는 말로 자꾸만 판단을 유보하고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인가 싶다.
그러나 훗날 있을지 모르는 수치심이 두려워 과거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또 미래에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을 덮어서는 내 인생이 조금도 나아질 게 없다. 훗날 그 부끄러움에 매를 맞더라도, 지금 내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아서 저지르는 잘못이 아무리 사소하다 한들 그 결과까지 사소하지는 않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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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장 지탄받아야 할 자는 학대행위자들임에는 틀림없다.
아동보호 전문기관 그리고 경찰의 처리 방식이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가 그들을 무작정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 글은 왜 이런 일을 막을 수 없었는지, 인간의 힘으로 세상의 악을 모두 척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왜 막지 못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생각해보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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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보호 전문기관
아동보호 전문기관(아보전) 말 그대로 '보호'기관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아보전 담당자는 정인이 학대 신고에 대해 80회 정도 '서비스를 제공했다'라고 말했다. 그중 반은 응답 없는 전화기에 전화를 건 행위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노력을 폄하할 정도는 아니다. 그들은 처벌이 아닌 '보호'의 측면에서 아동학대 사안을 대하고, 학대 행위 의심자를 교육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들이 학대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한다.
분리는 최후의 수단이며, 법적으로 경찰관이나 다른 권위 있는 공무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악에 받친 보호자가 소리를 지르기만 해도 그들은 덜컥 겁을 먹는다. 가해자를 단죄할 힘이 없기에 현장에서 먼저 꼬리를 내리고 무력함을 과시하여 가해자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처벌 권한이 없는 '서비스 제공자'이고, 보호자는 학대행위 의심자라 하더라도 가정의 보호를 위해 고쳐 쓰고, 바로 세워야 하는 '서비스 수혜자'라서 아보전은 보호자에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0여 개월 동안 정인이를 지켜봐 온 소아과 의사로부터 세 번째 신고를 받았을 때 학대 의심자인 양모와 함께 다른 의사의 소견을 다시 물었던 건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아예 학대에 대한 판단을 학대 의심자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다. 전문가가 필요하면 아보전의 주도 하에 적임자를 찾아 의뢰했었어야 하고, 양모와 양부의 진술만 믿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와 상식적인 정황으로 고차원적인 판단을 내렸어야 한다.
아보전은그런 고차원적인 판단은 경찰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1차, 2차 신고 때 아보전이 경찰에 수사의뢰를 했지만 경찰은 내사종결(수사도 시작하지 않고 종결), 혐의 없음의 불기소 의견(죄가 안되거나 증거가 부족하여 처벌할 수 없으니 검찰에서 기소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고, 거기에 기氣가 죽어버린 아보전은 3차 신고 때는 수사의뢰조차 하지 못했다고.
강제력을 행사할 권한이 없다는 말이 모든 판단을 다른 기관에 귀속시키라는 뜻은 분명 아닐 텐데, 그들은 경찰에게 판단을 의존하고 양부모에게 조사 과정을 의존했다. 그들은 무력했고, 또 그 무력감에 스스로 짓눌려 그들의 의무를 져버렸다. 세 번째 신고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너무 깊이 자각한 나머지 사안을 겉돌며 서비스의 횟수에만 치중했기에 놓쳤던 기회가 아닐까 싶다. 이런 상태로라면 아직 정인이가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신고에서 아이를 살려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애초에 경찰이 이 사건을 '학대'라고 판단했으면 어땠을까. 양모가 검찰에서, 법원에서 어떤 판단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양모가 쌓아온 사회적 이미지가 꽤 합리적으로 정상참작됐을 거라는 가정 아래 교육 조건으로 기소유예가 됐거나, 형량이 아주 낮거나 집행유예, 혹은 무죄를 받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마 정인이는 치료를 받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살아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적어도 소아과 의사가 강력하게 아동학대 소견임을 주장했다던 세 번째 신고에서만이라도 정인이가 치료받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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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정인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경찰관은 두 부류로 나뉜다. 경찰서 내의 아동학대 담당 경찰관과 여성청소년수사팀의 수사관.
112 신고가 들어오면 현장출동을 나가는 지구대 경찰관은 초동조치만 행할 뿐이므로 이 사안에서는 크게 관련이 없었다고 본다.그리고 여성청소년과 에서 아동학대 사건 출동 경찰관이 매번 달랐다는 것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본다. 한 팀에서 책임지고 조사를 꾸렸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공무원 사회는 잦은 인사이동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훌륭한 인수인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분명 매 신고마다 그들은 결과를 남겼을 것이고 후발주자들은 이전 신고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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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1 : 아동학대 담당 경찰관 (APO)
양천경찰서에서는 학대 담당 경찰관이 두 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학대 담당 경찰관은 경찰에 학대 신고가 되면 그 경로를 불문하고 그 사안들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정폭력을 예로 들자면 3번 이상 신고되는 경우에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 하에 일정 기간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 사실이 없는지 관찰한다. 아동학대도 가정폭력에 준한 매뉴얼이 구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경찰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학대 경찰관들은 아동학대와 노인학대, 가정폭력까지 담당하므로 일이 너무 많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전국의 모든 경찰관의 사정이 같지는 않다. 어떤 경찰서는 신고가 많아 3명이 그 일을 나누어하기도 하고, 치안 수요가 적은 곳에서는 한 명이 다 진행하기도 한다. 행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일이 많아서 정인이 사건을 처리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변명은 각 경찰서 사정마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상부의 지시에 따른 불필요한 행정 업무나 홍보 업무가 지나치게 가중되었다거나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매뉴얼 항목이 늘어 진정으로 한 사건에 집중할 수 없다는 변명이라면, 그것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조직의 한계라고는 해도 갓 돌 지난 한 아이가 처참하게 죽어 나간 이 사건의 해명이 되기엔 옹색하다.
현장에서는 학대 담당자가 분리 판단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항간에는 과거 아동학대 담당자였다는 사람이 썼다는 글이 떠돌고 있다. 아동학대 판단으로 보호자와 아동을 분리조치했다가 나중에 아이가 말을 바꾸어 직권남용죄로 고발당해 선고유예를 받고,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 청구도 해주어야 했으며 3개월 정직 징계를 받고 휴직도 했다는 글이다.
이 글에 대해 조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경찰이 할 수 있는 분리 조치라고는, 현장에서 위험 방지를 위한 응급조치 말고는 크게 없다. 아동학대의 경우에 72시간까지 응급 조치로 인한 분리가 가능하고, 그 이후에 곧바로 응급조치 사실을 보고하고 지자체(구청) 통보한 후 검사를 통해 임시조치 신청해서 판사에게 판단을 받는다. 혹시나 응급조치와 그 이후 긴급 임시조치가 조금 길어졌다 하더라도 아동학대 담당자 홀로 그 판단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상부의 결재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분리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이기에 법적으로 지켜야 할 절차가 있고, 지켜야 할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면 민원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한 것이 된다. 만약 경찰관이 지켜야 할 것을 다 지켰다면 3개월 정직이나 되는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 무척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경찰이 올바른 절차로 응급조치(보호시설로 인도할 때 피해아동 의사 존중해야 함)를 취하고 나서 아동이 진술을 바꾸고 아동학대 범죄가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면 책임 논쟁 정도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법정형 5년 이하인 직권남용죄에 해당될 만큼일 수가 있는 건지, 아무리 민원인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합리적으로 유죄 판단인 선고유예까지 이어질 만큼이 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건에서 민원인들이 얼마나 집요했고, 그 과정에서 해당 경찰관이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한들 민원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민원인의 입장에서 소송을 제기하거나 고발하는 건 그들의 자유다. 무고죄의 판단을 받고서라도 경찰관의 처벌을 원한다는 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의 중심은 항의성 민원에대해 공정하고 신뢰할만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감찰과 사법부인 것이지, 항의성 민원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원인의 항의 그 자체를 없애려는 노력이 아니라, 민원인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를 의식하며 법적으로 빈틈없이 공권력을 집행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정당한 공권력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 회복이 필요하다. 개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외부 상황에 쉽게 진술이 오염되는 어린아이일수록 녹취록과 영상 증거물을 꼼꼼하게 챙겨 놓고, 관습적으로 선배의 일처리 방식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다시 한번 법과 매뉴얼을 챙겨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살짝 벗어난 이야기지만 경찰 조직에는 이런 류의 이야기가 매우 많다. 경찰관이라면, 발만 조금 헛디뎌도 교도소로 추락하는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직업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실수할 때도 있을 텐데 그에 대해 충분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에게 가혹한 값을 치르게 하는 조직의 시스템을 풍자하는 말이다. 기막힌 세상사에서 억울하게 범죄자가 되어버린 동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겪은 경찰관들의 가슴에는 그토록 시詩적인 한이 제각기 서려 있는 것이다. 경찰이 정당하게 공권력을 집행할 수 있는 환경의 부재, 조직에 대한 불신감의 문제는 각자의 가슴에서 침묵하는 비명이 된다. 어떤 경찰관이 상처에 술을 흘리며 살지언정 교도소 담장 위는 걷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마냥 그 하나만 비난할 수 없다고 옹호하는 동료애가 피어나는 건 이 때문이다.
이런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국회의 의지인지, 앞으로는 경찰관이 아동학대 사안에서 합리적인 판단 하에 적극적으로 분리 조치를 취한 후 아동학대 혐의가 없다고 결론이 났다고 하더라도 경찰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지 않는 면책 조항을 신설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진 법안이 18건이다. 거기에는 아동학대 조사를 방해하면 처벌하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어디 법이 없어서 정인이를 지키지 못했던가.
이미 법에는 경찰관이나 아동학대 담당 공무원, 아보전의 조사를 방해하는 자에 대해 처벌하는 조항이 있다. 다만 이 조항을 집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학대 의심자에게 협박을 당하고 신체적 위협을 느껴도 그 순간 적극적으로 법집행을 하지 못하는 패배주의가 만연하다. 공권력을 잘못 집행했다가는 교도소 담장 안으로 떨어질까 봐 두려워 함부로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막연히 부담스럽다. 이 순간을 증거로 남길 수 있을지, 괜한 직권남용이라며 훗날 시달리지 않을지, 사소한 일로 분쟁을 일으켰다며 조직에서 미움받지 않을지 계산하다 보면 제복 위의 단단한 흉장이 무색하게 괜스레 몸이 움츠러든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시간은 가고, 무언가를 잘못하는 것보다는 안 하는 것이 낫다는 깨달음이 올 때쯤엔 교도소 담장 안으로 떨어지는 '사고'는 단지 '불운'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정신적 결계를 두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경찰관 개개인의 안에 자리 잡은 무력함이다.
어쩌면 인간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경찰에게 일상적으로 쏟아지는 혐오표현, 별다른 교육 없이 현장에 세워놓고 탈 날 때마다 업무량만 늘리는 윗선의 행태, 직무의 전문성에 대한 자존감보다는 계급별 자존심이 우선하여 습관적 모멸감과 불안감이 팽배한 조직 분위기에서는, 아마도, 그러지 않기가 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또 다른, 좁은 길은 있기 마련이고 '인간적인' 이해로 '인간성'을 저버리는 행태까지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여기까지 긴 글을 썼지만, 주로 일반론적 이야기에 그쳤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문제들을 논하기 전에 구체적인 문제들을 개별 사안마다 달리 원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먼저인데, 세상은 미리부터 정책과 현장의 어려움만 따지고 든다. 자존심은 내려놓고, 개별 사안을 정면에서 깊숙이 들여다본 후에야 더 본질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 그러고 나서 거시적으로 조직적 문제를 진단하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꾸려 현장에 실질적으로 접목시키는 노력을 해 나가야 그게 순서다.
정인이 사건에 있어서는 비단 분리조치뿐만 아니라 경찰이 꼭 해야 할 조사를 하지 않은 것, 3번의 신고를 안일하게 넘겼던 것이 문제가 된다. 그 신고 중 두 번은 아동 보육에 경험이 다분한 어린이집 선생님과 전문가인 소아과 의사였지만 그들이 제시한 증거는 묵살되었고 그들의 목소리와 반대되는 증거들만 취사선택되었다. 정인이 사건만 들여다보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호소만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이 분명 있다. 그렇기에 그동안 있어왔던 현장의 사례들과 완전히 동일시될 수도 없고, 경찰관을 무력하게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 다니는 존재로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도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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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2 : 여성청소년수사팀
아동학대 담당 경찰관이 아동학대 신고에 대한 전반적인 행정적 관리를 한다면, 최종적으로 아동학대 범죄 여부를 결론짓고 검찰에 송치하는 것은 여성청소년 수사팀의 소관이다. 여성청소년수사팀 경찰관의 수는 평균적으로 한 팀에 4명 정도일 것이다. 여성청소년 수사팀의 업무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체험적 의미에서 무지한 까닭에 내가 그들의 업무 처리 방식과 현실적 어려움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다만 사회적 이슈를 몰고 다니는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학대, 실종 사건을 처리해야 하다 보니 그 어떤 부서보다 촘촘한 지뢰밭을 위태롭게 걸어 나가는 형국이며 기피부서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 추상적인 어려움 외에 이 사안을 살펴보자면, 일반인의 관점에서도 오랜 기간에 걸쳐 정인이의 몸에 난 수많은 멍 사진에서, 신고자의 신고 내용에서 수사팀이 아동학대 혐의 없음이라고 결론 내린 정황은 선뜻 상상하기 어렵다. 굳이 학대 의심자를 처벌하지 않고도 아동보호사건으로 처리하는 방향도 있었을 것이고, 상담 치료 등을 받는 조건으로 검사가 기소유예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곧바로 무혐의 결론이라니. 이쯤 되면 증거 불충분이란 증거가 부족하다기보단 증거를 찾을 의지가 없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생각은 '수사'에 대한 내 경험에 따른 편견일지도모른다.
나는 승진 시험을 치기 위해 한 달간 무단 조퇴를 하고 또 다른 한 달간 무단결근을 했던 두 명과 이를 방조했던 팀장을 직무유기죄로 고발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진실을 진실이라 인정하는지 정말 궁금한 마음에, 그렇게 까지 해봤다. 무고죄로 역고소당할 수도 있었지만, 객관적 증거를 가지고 있고 진실이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결과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수사관은 사무실 내에만 열 명이나 되는 목격자의 조사를 하지 않았다. 공정하지 않을 거라 예측해서 그랬다는데, 그렇게 치면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하다못해 학교폭력까지도 참고인 진술을 받아서는 안된다. 수사관은 단지 감사원 조사 결과지만 꼼꼼히 해석했다. 그 안에서도 출근 기록과도 같은 업무용 메신저 로그인 기록과 그들이 밖에서 공부했다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은 무시했다. 가장 자주 들은 말은 '그 정도 일로는 그들이 징계를 받아야지 처벌은 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수사관은 내가 내민 증거를 반박하는 피의자들의 진술만을 차용해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수사 행정력을 아꼈고 그 이후의 민원의 소지도 봉인했다.
물론 그들은 징계도 받지 않았다. 감사실 직원이 직장 내 괴롭힘 조사 중에 당사자에게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그 사실이 있냐고 물었었고 당사자가 아니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론이 났는데 한 번 더 조사하면 민원의 소지가 있다며, '요식행위'일지라도 끝은 끝이라고 말했다.
그들로서는 현명한 처신이었다. 진실을 보기보다는 목소리가 큰 쪽의 편을 들면 사건은 더 쉽고 빠르게 해결된다. 어떤 사건이든 시끄러운 건 빨리 해결해야 안도의 영광이 따르는 법이다. 그것이 '업무처리'의 방식이고, 그들의 능력이다.
이것은 비단 경찰 조직에서 만의 일이 아니다. 뇌는원래 게으른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 대부분의 습속이 그러하다. 모든 갈등이 있는 곳에 더 큰 목소리를 가진 이는 힘이 세다.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학교폭력 사안이든, 장애인 사회든, 약자가 있는 곳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사 불변의 법칙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세련되고 허황된 일처리 방식이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을 쫓는 것이 아닌, 민원 소지를 계산하여 일의 경중을 나누고 처리하는 방식에서 그에 따르는 대가는 무겁다.
전반적으로 나는 경찰관, 아보전, 아동학대 담당 공무원으로 책임 소재가 분산되어 있고 업무 경계가 불분명한 현장이 문제라는 김예원 변호사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경찰관이 즉시 분리와 같은 법적 판단과 수사에 집중하고, 아보전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집중하고, 아동학대 담당 공무원은 이 모든 사안의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 명확한 경계 안에서 각자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제도가 완비되어야 하고, 각자의 역할 안에서 기본적인 원칙들을 지킬 수 있도록 예산이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일 할 사람이 살아 있고 현장이 살아 있어야 해결될 문제지, 매뉴얼 몇 글자 늘리고 법조문 몇 글자 뜯어고친다고 달라질 일은 아니다.
경찰 조직 내부에 그 질문을 던진다면, 그 보다 할 말이 많다.
그들이 자꾸만 판단을 유예하는 이유는 유약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두렵기 때문에 유약하다.
그들은 자체적인 판단이 두렵다. 정신없이 분주한 현장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고 그에 대해 합리적인 평가가 내려질 거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비난이 두렵다. 언론의 질타가 가뜩이나 무기력한 그들에게서 권위를 빼앗아가면 현장에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한 조각도 빼앗길까 두렵다.
그들은 동조하지 않는 언어가 두렵다. 상사의 주관적 평가와 동료의 주관적 평가로 개인의 승진과 인사이동이 결정되는 친밀형 인사 시스템 안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잘난 놈보다는 시시비비 따위는 뾰족하지 않게 웃어넘기는 바보가 낫다.
바보가 편하지 <바보 빅터 中>
조직의 화합을 위해 바보를 자처하게 된 어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경찰관들은 동료애가 남다르다. 상관의 주관적인 평가와 조직 내 동료평가가 주를 이루는 승진 시스템, 친밀함으로 이루어지는 자리 찾아가기(실제로 좋은 자리는 힘 있는 인맥을 타야 갈 수 있는 현실.), 내가 어느 자리에서 어떤 업무를 하게 될지 모르는 순환 보직 시스템은 경찰관들이 세평에 유독 민감하게 만든다. 조직 내부적으로도 인사에는 윗 선 누군가와의 친밀함이 우선이라는 것, 동료들의 세평이 공공연히 인사 기준으로 정립되어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누구의 뜻이든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게 낫다. 튀어서 좋을 건 없다. 괜히 동료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나중에 나에게 어떤 영향이 올지 모른다. 친밀감이 영향력이고, 흡연이든 주(酒) 연이든 인맥이 능력이다.
동료애로 화합하는 조직에서 크고 작은 잘못들은 쉽게 묻힌다.
정인이 사건에서 1차, 2차, 3차 신고를 받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경찰관들도 모두 동료다. 그 11명의 경찰관들 중에 그 사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동료들의 판단을 뒤집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혹시나 조사했다가 더 큰 민원이 발생하거나 아동학대가 아니라고 결론이 난다면, 동료들에게 쓸데없이 업무를 가중시켰다며 미움을 살 수도 있다. 그 위험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그들과 함께 있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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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를 자처하는 세상에서, 희망은
경찰관이 동조하지 않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되려면 탄탄한 전문성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전문성은 바쁜 일상사에 찌든 경찰관 개개인을 몰아붙인다고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누군가의 욕망이 침투했을 기획서 하나로 몇 시간 교육을 이수하게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담당자 자리 하나 늘린다고 해서 나아질 일도 아니다. 전문성을 키우는 것은 신발끈을 제대로 매는 것과 같다. 신발끈이 풀어졌을 때 단단하게 묶어야지, 귀찮다고 대충 묶거나 모양에만 신경 써서 묶으면 걸을 때마다 풀어진 신발끈이 걸음을 막아선다.
현장의 전문성을 담보하려면, 일단 책임 소재는 하나로 묶어야 한다. 현재에는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사회적 현안 신고마다 112 신고에 대응하는 지역경찰관들 뿐만 아니라 여성청소년수사팀도 출동하게 하여 전문가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들이 판단하고 그들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 몇 건씩 쌓여가는 신고 사안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여성청소년수사팀이 져야 한다면, 그 누가 그 일을 맡으려 하겠는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하여 일을 줄이는 것이 필수다. 이리하여 여성청소년수사팀과 아동학대 담당자 경찰관의 불필요한 업무는 단호히 줄여야 한다. 홍보는 홍보 기능에 일임하고(윗 선의 욕망만 충족하고 실질적으로는 별 도움도 안 되는 일회성 홍보나 아이디어 경진대회를 방불케 하는 특이한 홍보 업무가 너무 많다. 교통이든 여청이든 홍보에 치중하는데, 엄연히 경무과에 경찰 홍보 담당자가 있지 않나?), 성범죄자 관리와 같은 예방 업무는 행정 업무 담당 부서에 일임한다. 이런 식으로 일어난 사건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안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단호히 줄이는 방법도 고안한다. 감사원의 업무처리 방식처럼 민원 응대와 전문 수사인력 사이에서 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돕는 인력이 생기면 어떨까 생각한다. 긴급 신고에 출동한 지역경찰과 수사를 진행할 수사관들 사이에서 경찰의 조치가 불필요한 사안은 걷어 내고 1차적 수사 개시 판단을 내리고, 현장에 출동한 지역 경찰관들의 질의에 응답하고, 모든 학대 신고의 통계를 관리하여 재발 가능성이 큰 가정을 관리하고, 필요한 정보와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수사관이 전반적인 내용 파악에 드는 노력을 줄여주는 그런 인력이 있다면 어떨까. 그 인력이 신고 내용 파악과 1차적 수사 개시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는 단순히 수사팀의 보조 인력이 아닌 대등한 위치 해서 판단을 존중받을 수 있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문성에 대한 온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줘야 하는데, 그 보상이 단순히 '승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법을 근거로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직군에서는 언제나 보상에 신중해야 한다. 공익이 우선해야 할 공직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게 된다면 그 피해자는 언제나 힘없는 국민이다. 온당한 평가는 경찰 개개인이 전문가로서 자존감과 윤리의식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지, 시끄러운 박수와 화려한 꽃으로 수놓아진 영광스러운 '승진'의 한 장면이 보상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별 고민 없이 세팅된 단순하고 자극적인 보상 체계는 강한 인정 욕구의 그늘에서 병적으로 비난을 두려워하는 개인을 양산한다.
막연히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제대로 일하기 힘들다. 어느 정도 선에서 국민의 비난은 경찰관으로서의 숙명이다. 우리의 역사가 과오를 저질렀고 그 죗값은 현장에서 민원인을 응대하는 개별 경찰관들이 치르고 있다. 역사의 과오는 부정한다 해서 지워지지도 않고 역사적 인식 없는 개인은 그 짐이 무겁기만 하다. 국민의 막연한 혐오 아래에는 경찰이 공정한 일처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뿌리 박혀 있다. 그 뿌리가 단단히 박혀 경찰관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한데, 우수 사례를 발굴해서 카메라 안의 세상을 홍보하는 현 세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웃는 얼굴로 포장한들 경찰관을 만났던 국민들의 경험이 변하지 않는 한 불신감만 더 깊어진다. 큰돈 주고 산 제품에 문제가 생겨 AS를 받으러 갔더니 친절한 미소로 과잉 수리를 권한다면, 그 미소에 속을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친절 프레임에 갇혀 경찰관을 서비스직에 머무르게 하는 방식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경찰관을 병들게 할 뿐이다.
이제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다. 불필요한 업무는 줄이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될 때가 된 것이다. 공권력은 국가의 힘을 업고 타인에게 휘두르는 정당화된 폭력이다. 공권력의 집행자가 타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 막중한 의무와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 책임을 제대로 완수해낼 수 있다는 자존감이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가슴 안에서 툭 터져 꽃봉오리를 피워야 비로소 올곧은 법집행자로서 당당히 설 수 있다. 그제야 경찰관들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타인의 비난에 휘둘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진짜 권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패배감은 이제 안녕 <바보 빅터 中>
# 결론,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을까
결국 희망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를 탓하기는 쉽지만, 그 제도며 그 시스템이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 인간의 산물이며 인간의 경험이다.
수사권 독립을 향해 가는 경찰 조직의 현주소에서 한 아이의 죽음은 그 어떤 역사보다도 아프고 뜨겁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스스로 판단하는 전문성 있는 경찰 개개인이 책임감을 통감하며 공권력을 바로 세울 수 있는 힘,
그리고 개인에게 그 과중한 책임을 몰아넣기보다는 때로는 개인을 지켜주고 때로는 비열하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조직의 힘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각 경찰관이 보다 강건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