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분들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서울에서 오신 높은 손님을 부산의 높은 분이 맞이하는 자리. 실무자들은 서울 손님의 방문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분주해졌고 격에 맞는 식당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식당은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적당한 사회적 거리를 지키며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함이 없는 곳으로 정해졌다. 미리 세팅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정해진 자리에 미리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할 새가 없었다. 혹시나 실수하지는 않을까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진솔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러 온다는 명분이 무색하게도 솔직한 대화를 나눌 것이라 기대할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다. 실무자들은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부지런히 높은 분의 동선을 파악했고, 그가 마땅히 들어야 할 말을 기획해 놓았다.
손님이 들어왔다. 우리는 일동 기립했다. 높은 분은 천천히 악수를 청하며 인간 바리케이드를 지나 정해진 자리로 안내받았다. 잠시 안부를 나누고 환담을 나누다가 손님은 빈 물 잔을 들었다. 그 순간 앞에 앉아 있던 충분히 높은 분이 잽싸게 물병을 쥐고 살짝 몸을 세워 앞으로 굽힌 후 물 잔에 물을 따랐다. 손님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의전을 너무 잘하시네요."
그것이 '의전'이라는 단어를 처음 인지한 순간이었다.
그전까지는 각을 맞춰 진열해 놓은 회의 서류와 검은색 펜 대,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삼 색의 플러스 펜과 새로 깎은 반듯한 연필과 깨끗한 지우개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틀에 박힌 순서에 따라 격을 갖춘 행사를 진행하면서도 왜 꼭 높은 분이 제일 먼저 '명언'과도 같은 한 말씀을 해야 하는지, 그 한 말씀을 위해 왜 실무자는 밤을 새워 인사말을 작성해야 하는지, 높은 분이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정해진 자리에 앉기까지 왜 다 큰 어른을 보좌하며 시간을 알리고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자리에 안내하는 네댓 명의 사람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전'이란 넓게 말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이 지켜야 할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예의범절(사교 의례)이라고 한다.(출처: 외교부 홈페이지) 상식이 변하듯, 의전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서울시 의전 실무 편람에 따르면 의전의 양상은 간소화되고, 시민 참여를 장려하여 행사가 내실화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국가 내외의 공식행사에서의 격을 맞출 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법령에서 정한 직위에 따른 의전서열이다. 일반 국민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듯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재소장, 국무총리 등의 순서로 서열이 정해져 있고, 그 외에 공무원들은 계급과 직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현실적으로 높은 공적 지위는 대부분이 남성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슷한 지위라면 여성이 높은 예우를 받겠지만 이는 약한 여성에게 은혜를 베푸려는 신사적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실제 행사에서 여성이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여성 중에서도 미혼자는 미망인보다 낮고, 미망인은 기혼자보다 낮다. 그리고 기혼 부인 간의 서열은 남편을 따른다. 결과적으로 공직의 낮은 곳에는 언제나, 미혼의, 여성이 있다.
직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공직의 가장 낮은 계급인 9급, 10급에 수많은 남성들이 있다. 다만 의전서열은 실제로는 국민이 상식적이라고 합의한 정서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고, 아직도 공직사회에서는 여성이 더 낮은 위치에 있다는 사회적 함의가 드러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는 말이다.
나는 미혼 여성으로서 가장 낮은 계급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미혼 여성으로서 겪어야 할 장애물들이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내용으로 보고를 해도 계급이 높은 남성은 결재를 해주고 나에게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던가, 내가 성과를 내면 기어코 못한 점을 찾아내어 회의시간에 혼을 내고 동료 남성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않아도 칭찬일색이라던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학벌로 잘난 척하지 말라며 무안을 준다던가, 여성과 함께 일하기 힘든 점을 토로하며 여직원에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낸다거나, 인사 철에 사무실에 여자 직원의 전입을 막고 다른 남자 직원이 오도록 손을 쓴다거나.. 내가 겪은 것만 말해도 무수히 많은 사례가 떠오른다.
여성으로서 가장 힘든 점은 단연 '성'인식 문제이다. 기관마다, 지역마다 성인지 감수성의 수준은 사뭇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어린 여직원에게 남자 친구와의 잠자리 문제나 풍만한 몸매에 대한 성적 농담을 던지고도 동료들의 침묵으로 무사히 공직생활을 이어가는 남성들이 있고, 어떤 곳에서는 반가운 마음에 여직원의 손목 한 번 잡았다가도 국가적 비난에 시달리는 남성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여성 상사가 남성 하급자에게 한 성희롱 발언도 공론화되어 법의 처분을 받고, 어떤 곳에서는 같은 여성이 피해자 여성을 따돌리고 괴롭히기도 한다.
공직사회의 성인식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리 잘 봐주어도 아직은 멀었다. 여전히 개인 공간을 누리는 어떤 높은 분은 젊은 여직원만 보면 반색하며 자신의 공간에 초대를 한다. 회식이 끝난 후 서열로는 대화도 섞기 힘든 계급의 남성이 조용히 어린 신입 직원을 불러내기도 한다. 승진하여 멀리 떠나가는 상급자를 모셔가는 차 안에 굳이 어린 여직원을 태워 기분에 취한 상급자가 '좋은 말씀'을 한답시고 가는 내내 여직원의 손을 조물딱 거려도 그 자리의 선배들은 말 한마디 못했다. 훗날 미안함을 표하는 선배의 말에 그 여직원은 '괜찮아요.'라며 웃어넘겼고, 그 여직원은 이 시대의 쿨한 여성상으로 길이길이 추앙받았다. 그 후에도 공식 행사를 빙자한 회식 자리에서 높은 계급의 남성 곁에는 어린 여직원들이 웃고 떠들며 여성 특유의 활기참으로 분위기를 끌었고, 선배들은 흐뭇해하며 여직원들에게 '고생했다'라는 말을 전했다. 여직원들의 환대에 기분이 좋았을 인사권자는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 그 선배들의 앞 길에 호의를 베풀지도 모른다.
성 문제는 가해자인 남성과 피해자의 여성으로 나뉜 이분법이 아니다. 오로지 단 한 명의 피해자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공직사회의 혐오만으로 이분된다. 여성, 남성 구분 없이 피해자를 감시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처벌한다.
나는 조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여성이었고, 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보이는 비난과 보이지 않는 공격을 받았다.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은 의혹들로 오염되었고, 나는 승진할지도 모르는 가해자의 앞길을 막은 악랄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어떤 여자 선배는 가해자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말아야 할 것이 드러났다며 안타깝다 말했다. 실제로 공포로 조성한 침묵 속에 활개 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상급자들의 만행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결계를 친 듯 나를 피했다. '나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라며 조직 내 이질적 존재에 대한 공감대가 무르익었을 때 더 침묵하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이 일었고, '가해자가 불쌍하다'며 탄원서를 써내어 자신들은 '동지애가 없는' 나와는 다르다는 선언을 한 후 종국에는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일들도 나의 이름으로 채색되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주홍글씨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 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맥락 없이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다'라며 위로하거나, 섣불리 내게 있었던 일을 변명하며 뒤에서 들리는 소문들을 악의 없이 전해주었다. 악의는 없었으나 무지했던 말들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서도 반복적으로 그러한 말을 듣다 보니 나는 매일 보이지 않는 시선의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내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타인의 비난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보이지 않지만 맹렬한 공격에 허물어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이 당한 아픔을 호소한다면 나는 조직 내에 '피해자'로서의 지위가 어떤 것인지 최대한 구체적으로 말해 줄 작정이다. 부당한 사건이 명백하더라도 소수자가 되는 선택은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해 줄 것이다. 내가 느꼈던 솔직한 감정과 나를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의 비참함,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희망을 가지고 싸워왔던 그 요약할 수 없는 지질함을 구구절절 보여줄 것이다.
그럼에도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목소리를 내기로 한 선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타인들의 동조와 응원'도 아니고 '시원섭섭한 복수'도 아니라고. 세상은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고, 상식적으로 명약관화한 일도 지지부진하게 처리될 것이며, 헝겊을 덧대어 구멍을 막듯 타인의 성급한 위로는 자신을 더 외롭게 할 것이라고. '진실'로 나아가는 길은 무진장 고독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 선택을 하겠다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떳떳함' 뿐이라고.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될 일과 말을 해야만 하는 일을 구분하게 될 것이며, 부당함에 상처 입은 마음을 공론화 함으로써 실체 없이 두려워했던 나약한 마음 하나는 이겨내게 될 거라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는 미숙한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쉬이 주눅 들고 스스로에게 모질었던 자신을 위로하게 될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인이 된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발화했던 그 여성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견뎌야 할 앞으로의 시간들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공직사회 속에서 계급의 경직성과 침묵을 종용하는 공무원들의 인식, 하급자를 하대하는 것에 관대한 조직 분위기, 예의의 범위를 넘어 자신을 바짝 낮추는 '의전'을 자처하는 하급자들과 이를 평가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맞아떨어진 욕망을 고려해 봤을 때 당신의 고소 내용은 충분히 일리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나는 그녀가 내민 증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지자체를 이끌던 지휘관이 흔들릴 만큼 신빙성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시에 故 박원순 시장의 과거 행적과 위업이 폄하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의미 있는 결과들을 이끌어 냈을 때 분명 억울한 여성들은 위로받았다. 그가 청렴한 시장으로서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했을 때 분명 시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 희망했다. 그는 선량한 시민들의 마음을 울렸고, 시민들은 그가 더 큰길로 나아가길 빌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허망하다.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사람과 하지 않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위인이 되었던 영웅도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안락함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노동자들도 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곳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그는 훌륭한 일을 했지만 그럼에도 해서는 안될 일을 했을 수도 있다. 중요하고 어려운 사안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별 의식 없이 하급자의 '존재'를 침해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실수라고 축소해서도 안되고,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잘 먹고 잘 산다고 잘못을 덮어서도 안된다.
박원순 시장에 대한 고소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다. 고소는 했지만 사실 판단은 받지 못한 억울한 여성의 고통은 배가 되었다. 그는 죽었지만 수사는 진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성추행 자체로 그를 처벌할 수는 없지만, 그 일의 사실 여하에 따라 그녀에게 도 넘은 악플을 행한 자들의 죄가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인지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인지 나뉠 수 있기 때문에 성추행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는 말도 일견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어떤 조사든지 한 편에서 제출한 증거로만 조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언론에서도, 사법부에서도 반론권은 헌법적 가치로서 보장되어야 한다.
법정형 중 최고형은 사형이다. 범죄가 의심되는 피의자는 수사단계를 지나 범죄를 구성하는 사실과 충분한 증거에 따라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서 공방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들과 증인들, 피고인과 피해자가 설전을 벌이고 치열하게 합의점을 찾아 나간다. 판사는 국민적 정서와 드러난 증거, 참작할 만한 사유를 끌어 모아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만, 현실적으로 그 판단이 충분히 피해자를 위로했다는 공감대는 얻기 어렵다. 법은 부끄러움도 없이, 약한 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고, 지식과 자본을 가진 이에게는 관용을 베푼다.
아마 지식과 인적 물적 자본을 갖춘 박원순 시장이 살아 있었다면 그에게 내려질 법의 판단은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그는, 그 스스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혼란을 남겼다. 그를 사랑하던 이는 그를 옹호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화가 났다. 그 어떤 논리로도 빈약한 현실을 해명할 수는 없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진실은 존재했고, 그 진실을 파헤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린 그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죽음은 먹먹했다.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고통이 무엇이기에 뭐가 그리 급하다고 가방을 메고 바쁜 걸음으로 죽으러 가는지, 그래도 살았어야지, 살아서 사과하고 견뎠어야지, 하고 허공에다가 가는 이를 보내지 못한 손짓을 훠이훠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죄의 여하와 그가 느꼈을 고통의 바로미터는 관계가 없다. 그의 고통에 빠져 살아있는 그녀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회색의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미워하든 그녀를 미워하든 얼른 마음을 정해 울부짖었지만, 그런 뜨거운 감정은 선량한 가면을 쓰고 휘두르는 칼일 뿐이다.
그가 스스로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죽음으로써 고소인의 고통을 더했다는 비난으로 그의 죽음을 괄시하고 싶지도 않고, 그가 이룬 업적까지 모두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삶의 그 어떤 문제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죽음' 자체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착한 사람은 착한 일만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일만 할 거라고 단순화시키며 인지적 부조화를 극복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영원한 침묵의 세계로 떠나갔다. 그는 갔지만 남아 있는 자들에게 과제가 쥐어졌다. 나는 세상이 그 과제를 조명하여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침묵에 매달려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이 고소인을 비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 스스로도 그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존경받았던 사람이 죽음을 택한 일은 안타깝지만 그 상실감으로 희생자를 찾아서 처벌하려는 마녀 사냥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엄연히 그 자신이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고소인은 진실을 인정받을 기회를 잃었다. 나는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위로받기를, 무지하고 화가 난 대중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상처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녀가 고된 과거와 화해하고 언젠가는 세상을 향해 웃어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허무하게 홀로 남아 고독한 싸움을 이어 나갈 그녀를 응원한다.
동시에,
외롭게 떠나간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