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게 나눠먹으면 더 맛있어!
나와 내 애인은 같은 대학교에서 만나 연인이 되어 한 달 후면 3주년이다. 같이 백년해로할 운명인지 각자의 직장도 집도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아 같이 자주 저녁을 먹는 일이 많다. 그렇게 일주일에 2~3일씩은 만나면서 오손도손 같이 저녁 식사를 즐기다 오랜만에 대학 동기 친구 영식이에게 얼굴 좀 보자고 연락이 왔다. 영식이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한 베프고, 여자친구와도 같이 자주 만나 놀기도 해서 서로 불편할 게 전혀 없다. 그래서 오늘 셋이서 저녁이나 먹자고 내가 제안했고 저녁 7시 즈음 회사에서 퇴근한 나와 내 애인, 그리고 친구 영식이는 동네 백반집에 모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돼지불백정식을 먹고 있다.
정식을 시키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갖가지 밑반찬에 찌개와 국물, 그리고 달짝지근한 돼지불백까지. 한국인이면 특이 식성을 갖지 않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메뉴다. 점심을 시원찮게 먹었는지 배가 하도 고파서 눈앞에 놓인 풍경에 한껏 들뜬 채로 젓가락을 쥔 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식이와도 3개월 만에 만나서 반갑게 서로 안부를 물으며 왁자지껄 식사를 즐기고 있는 와중, 순간 벌어진 어색한 사건이 내 눈에 밟혔다. 영식이가 짭조름한 반찬을 먹고 싶었는지 깻잎 장아찌가 놓여 있는 접시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고, 잘 떼어지지 않아 끙끙대던 영식이를 내 여자친구가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 깻잎 논쟁이구나! (먼저 말해두지만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나는 지금 오랫동안 연애는 꿈도 못 꾸고 있다.)
이 논점을 지금 다루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런 걸 가지고 뭘 논쟁까지 하나며 별 상관없지 않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논쟁은 상당히 심오한 고민을 갖게 했다. "낑낑대는 장면이 여자친구 눈에 밟힌 것은 그녀의 아리따운 따뜻함이겠지." "아니, 영식이에게 작게나마 관심을 내비쳤다는 뜻일 수도 있어!" 선성설, 선악설과 같은, 대체 왜 굳이 이런 얘기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는 사상 개념까지도 갖고 들어 와서 온갖 인간군상의 관념이 충돌하는 이 상황,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얘기를 먼저 하자면 나는 애초에 애인과 친구가 섞이는 것 자체를 꺼린다. 여자친구와 만나는 시간은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으로만 남기고 싶다. 타인이 추가되어 목적이 바뀌는 가능성을 꺼린다. 물론 내 친구들, 여자친구의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 얼굴을 비춰야 하는 상황이 사귀다 보면 생길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재미있게 놀라고 하고 최대한 빨리 빠지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 상황에 내 여자친구가 영식이의 깻잎을 떼어 주는 상황을 목격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이렇게 생각하겠지. "아 역시 우리 여자친구는 참 착해!"
깻잎 몆 장 떼어주고 말고로 여자친구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타인에게 얼마나 마음을 주고 있을지를 판가름하겠다는 사고 자체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애인은 내 아바타가 아니다. 애인은 타인에게 친절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고, 나는 이에 대해 가타부타 혀를 놀릴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서운하다고요”라며 자신의 왜곡된 소유욕을 부정하겠지만 결국 그 서운함이라는 감정마저 애인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 하나하나를 캐치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오만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는 힘들다.
반면에 애인이 내가 아닌 남에게 깻잎을 떼어주는 모습에 좀 짜증이 날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겠지만 그래도 질투가 많은 편이라 토라질 수도 있을 듯하다. 그것은 본능이니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싶지 않다고 느껴지지 않게 할 수 없다. 따라야만 한다. 그렇게 구차하고 싶지 않은 쿨한 나로 존재하고 싶겠지만 쉽지
않다. 얼굴이 굳어지고 몸이 달아오른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 연락도 내가 먼저 하고 여자친구는 최근 들어 조금 나한테 차가워진 것 같다. 안 그래도 서운한데 저렇게 아무리 친구래도 남인데, 걔가 뭘 먹는지 신경을 쓴다는 게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옆에 있는 나인데, 그런 남는 관심 있으면 그것도 나 다 주면 안 되나?!
두 의견 모두 그르지 않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사고다. 사랑은 소유욕의 발현이 아니다. 연인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모습을 본받으며 본인과, 또한 관계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랑과 소유욕, 이 두 가지 개념은 불가분의 존재다. 남친/여친의 애정이 고픈 것은 본능이니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개성을 받아들인다느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껴 준다느니 다 공허하게 바스러질 뿐이다.
깻잎 하나가 이리도 파격적이다. 뭔 깻잎 가지고 이렇게까지 떠들어대나 싶겠지만 깻잎 한 장으로 이렇게까지 얘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다. 철 지난 대화주제지만 애인과 깻잎 논쟁을 주제로 대화를 깊게 나눠보는 것도 그래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애인이 어떠한 성향의 인간인지 알아보고 맞춰 주려 노력할 수 있는 동아줄이 하나 떨어졌다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이다. 가볍게 상대의 의향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대가 어느 쪽의 사람인지 알아도 오답이 아님을 알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을 얻었다. “사랑이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