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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Feb 25. 2020

하정우는 걷는 사람,

수진은 만보 걷는 사람

"쨍한 햇빛이 서글서글해진 늦은 낮과 이른 저녁은 딱 걷기 좋아."

더웠던 여름이 끝날 무렵, 수진은 만보를 걷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은 만보씩 걷고 있는 것 같아! 20분을 넘게 걸었는데, 발바닥이 아프지도 힘이 들지도 않았어." 

수진은 어제 온갖 기능이 탑재된 대륙의 실수라는 스마트 워치를 직구로 구했다고 신이 나서 실컷 자랑하고는 오늘은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무슨 일 있어?" 


수진은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을 하고는 스마트 워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퇴근길에 네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갔는데, 집에 도착해도 알람이 울리지 않더라고.. "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수진은 서서히 늘려 걸은 걸음이 만보에 미치지 못하는 걸음 수였다며,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음을 토로해 냈고, 갑자기 열의에 불타오르는 얼굴을 하고는 오늘부터 스마트 워치의 만보 알람이 울리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분다. 두껍고 어두운 외투를 입어도 어색하지 않다. 

"수진, 요즘도 만보 걷고 있어?"

베이지색 털실 목도리를 하고 걸어오는 수진에게 안부를 물었다.


"음- 솔직히 그동안은 만보를 채우기에 급급했던 거 같아. 갑자기 왜 걷기 시작했지? 궁금해지더라고, 걸어갈 때 지나는 상점 구경, 사람 구경, 나무 구경이 재미가 있어, 있잖아 걷는 것에 목적은 만보를 꼭 다 걷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이런 곳이 있었나?', '아 저길 언제 가보지?', '저 사장님은 가게가 참 잘돼서 좋겠다!', '춥지 않을까?', '나도 이 시간쯤 학원에서 집 갔는데..!', '벌써 낙엽이 다 졌구나...' 이런 생각하면서 걷는 게 참 좋아! 그러다 보면 만보를 다 걸어왔더라, 참 행복해."


수진은 걷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가끔 그리고 싶은 것이 생긴다고 생긋하게 말했다. 그리곤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멍한 얼굴을 하고 이어서 말했다.


"몽상에 빠져 걷다가... 한 번은 넘어지고 한 번은 신호등을 깜박 놓쳐 빨간불에 건넌 적이 있어. 허술한 사람이 되는 걷기 시간이 난 참 좋아. 매사에 너무 최선을 다하고 말잖아."


수진에게 실수하고, 놓치는 것은 치명적이다.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잔뜩 있는 누군가의 기업에서 소모품이 되지 않아야 하지만, 욕심이 많아 매번 최선을 다하고 만다. 수진은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욕심이 많아 최선을 다하려 애쓰는 수진에게 자책은 독이다. 수진은 걷는다. 몽상을 하는 허술한 사람이 된다. 오늘이 충분하다. 


죽을 만큼 힘든 시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하정우는 걷는 사람, 수진은 만보를 걷는 사람이다.

걷는다는 것은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문학동네 #걷는사람,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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