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기다리던 말을 들었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책을 읽어주었다. 책 읽어주기를 10년째 하고, 2년 동안 이야기 만들기를 하자,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중학생이 된 아이가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며 말을 걸었다.
"엄마, 국어 수행평가 책 고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입학 후 처음으로 도와 달라는 말을 했다. 매번 “도와줄까?”라고 물어보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거절했다.
"수행평가 주제가 뭔지 궁금한데."
"엄마, 내가 가장 잘하는 독후감 쓰기예요. 다만, 수업시간 4시간 동안 읽고 독후감을 쓰는데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고, 읽으며 생긴 질문을 통해 답을 적어야 해요. 쓰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는 말을 하며 책 10권을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갑자기 아이의 책 소개가 시작되었다.
"엄마, 첫 번째는 <리스크 : 사라진 소녀들>은 온라인 그루밍 범죄를 다룬 이야기예요. 요즘 온라인에서 많은 소통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책이에요. 알면 예방할 수 있지만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잖아요. 엄마도 한번 읽어보세요. 엄마 수업할 때 도움이 되실 거예요."
"두 번째는 윤정은의 <메리골드 마음세탁소>에요. ‘아픈 기억도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지우게 된다면 지금의 내가 사라진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잖아요. 우리가 겪은 불편한 사건들이 때로는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니깐요. 힘든 기억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줘서 좋았어요."
"세 번째는 윤정은의 <메리골드 마음사진관>에요. 우리의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서 행복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예요. 사실 친구 중에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들에게 작은 순간들이 모여 행복해진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네 번째는 이미예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에요. 다양한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네가 생각하는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에요. 다양한 꿈을 통해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어요. 또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에요."
"다섯 번째는 고상만의 <너의 바다가 되어>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어른을 위한 동화예요. 동물들이 동물원이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예요. 사실 푸바오도 중국으로 가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털이 많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동물이 과연 자연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생각이 담긴 글을 쓰고 싶기도 해요."
"여섯 번째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에요. 감정표현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그 속에서 다양한 질문들이 생겨요. 저도 책을 쓴다면 이런 다양한 감정을 다룬 책을 쓰고 싶어요. 고전이지만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서 몰입이 잘돼요."
"일곱 번째는 무라세 다케시의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에요. 급행열차 한 대가 탈선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대형 참사가 이어지는 이야기예요. 유령 열차가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사고를 당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는 없지만 만날 수는 있고 그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죽음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이 전해져 감동이 최고였어요."
"여덟 번째인 스미노 요루의 <밤의 괴물>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책이에요. 밤마다 괴물로 변하는 소년이 밤마다 왕따 소녀를 만나면서 학교 문제를 파헤치는 이야기예요. 집단 따돌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에요.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알게 해주는 책이에요."
"아홉 번째는 모리사와 아키오의 <치유를 파는 찻집>인데요. 7개의 에피소드가 나와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이 책도 너무 좋은데 어떤 걸 골라야 할까요?"
"열 번째는 아이시카 토마의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란 책인데요. 여성들이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고 일깨워주는 책이에요. 여성에 관한 책인데 남자 작가가 썼어요. 책을 통해 전쟁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해 준 책이에요. 엄마, 어떤 책으로 선정하면 좋을까요?"
책 소개를 들으면 들을수록 모두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이는 책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이 반짝거리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행복해 보였다. 아이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는지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엄마, 책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는데요. 우리 북토론 할까요?”
아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감동이 쓰나미처럼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와 함께 북토론을 하는 날을 꿈꿔 본 적이 있었다. 억지로 할 수 없기에 가슴 깊이 숨겨둔 혼자만의 소망이었다. 근데 아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오랜 기다림의 선물로 그토록 원하던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치며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아이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엄마는 완전 좋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재산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책은 아이가 살아가는 데 안내자 역할을 하기도 하고, 친구가 되어 외롭지 않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매주 도서관이나 서점에 방문했다. 서점에 가면 책 2권과 문구 1개를 사주었다. 처음 아이는 쇼핑하는 재미로 가더니 어느 날부터 책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고개만 돌리면 책이 있는 공간 속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랐다.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엄마의 노력이 필요하다. 10년 이상 같은 일을 반복하자, 아이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는 엄마가 믿는 만큼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