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업7년 차디자이너 출신 마케터의 스타트업 도전기 #프롤로그
2020년 4월 유난히 햇살이 따뜻했던 그날,
20대 중반 나의 열정을 다 했던 회사를 5년 만에 그만두고 얼마나 울었던지 모른다.
B2B 스킨케어 브랜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첫 입사할 때, 너무나 사랑하던 화장품은 이것저것 다 하는
올라운더 팀장으로 퇴사할 때에 지긋지긋한 화장품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퇴사하고 6개월을 내 인생 처음 백수로 보냈다.
지쳐있던 5년과 퇴사 과정에서 너무나 스트레스였던 감정소비를 털어내고자 휴식을 원했고, 충분히 쉬었다.
쉬는 6개월 동안 베이킹도 배워보고, 유튜브 영상편집도 공부하고.. 가만히 있는 걸 도통 못하는 내 성격에 쉬는 것도 쉬는 게 아니었지만 (?)
그러던 20년 11월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꽤 규모가 큰 B2C 스킨케어 브랜드의 팀장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말로만 듣던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회사를 경험했고, 이런 게 소모품으로 쓰다 버려지는 건가..
하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아.. 이렇게 일하다가 내가 쓰러지겠는데?
돈도 좋지만 내 성취감은 어디 있지?
이런 회사는 못 다니겠어.. 차라리 막내가 되자!
팀장도, 연봉도 필요 없으니까 다시 막내로 돌아가서
필드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싶어!
그리고..! 이젠 화장품은 죽어도 안 할 거야!
막상 막내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뷰티업계에 회의감이 들어 다른 업종을 찾으면서 구직사이트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 유독 눈에 들어온 채용 공고 글이 있었다.
전 직원 모두가 회장님 책상에 50인치 모니터 2개를 사용합니다.
평균 연령 29세의 젊은 회사에서 함께 할 마케터를 찾습니다.
연봉은 최저시급에서 조금 더 주는 수준. 현업 7년 차 막내. 처음 해보는 식품업계. 시스템도 없는 스타트업. 출퇴근은 고속도로를 타고 40분씩 가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아직도 면접 때 대표님께서 했던 질문이 기억이 난다.
" 이렇게 스펙이 화려하신 분이 왜 저희 회사에 오려고 하시는지? "
" 팀장에서 막내가 되고 싶어요. 열정적으로 으쌰 으쌰 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원합니다. "
" 연봉도 이 정도 수준으로 낮춰서 오셔도 괜찮으신가요? 뭐 - 빈 수레가 요란할 수 도 있으니까요 하하 "
면접을 보고 나올 때 나는 이 회사에 너무나 다니고 싶었다.
제발 저를 뽑아주세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내가 했던 화려한 이력과 나의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의 부품이 아니라 회사에서 중요한 한 명의 사람으로 파트너십을 가지고 치열한 회사 분위기와 모두가 한 방향을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 같은 팀원들은 나를 더욱 자극했고, 열정을 쏟아붓게 하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막내 생활이 시작되었다.
팀장에서 막내로 돌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 일하는 방식에 걸친 전반적인 모든 부분을 내가 참고 인내해야 했다. 나에겐 당연한 일과 루틴들도 나보다 이력이 낮은 선배들과 대표님에게는 낯선 일일 수 있고, 모두가 각자의 파트에서 프로일 수 없었다. 전문화된 프로세스와 업무 분장, 체계화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한 업무가 익숙했던 나에겐 낯설고 꽤나 힘든 환경였다.
면접 때 들었던 빈수레가 요란할 수 도 있다는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어야만 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직속 선배 (지금 회사의 대표님)이 수많은 도움과 의지가 되었다. 힘든 날에는 담배 한 대를 태우면서 같이 이야기하고, 퇴근 후 소맥 한잔으로 털어버리기도 하고, 팀장으로만 지내던 내가 선배라는 존재를 가지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태평양 바다 같은 선배 덕분에 수많은 문제들과 상황들을 해쳐갈 수 있었다.
올해 3월 초, 제품 론칭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몇 주째 밤샘 사진 촬영을 하고 있을 때,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던 선배가 장난 삼아 꺼낸 말이었다.
" 아.. 그냥 다 때려치우고 2000만 원씩 모아서 함바집이나 할까? "
" 아 좋아요! 저는 뭐할까요? "
" 설거지해요 설거지 "
" 네네! 저 2000만 원 투자하고 설거지하러 갈게요 크크 "
밤샘 촬영의 피로를 날리기 위한 장난 같던 말이었지만, 그래도 선배와 함께한다면 무슨 일이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을지도 모른다. 선배와 일한다면 뭐든지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땐, 막연하게 내가 너무 좋아하고 의지하는 선배가 대표인 회사라면 힘들 것도, 못할 것도 없을 것만 같았고,
젊음의 패기 넘치는 도전이 청춘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게 장난 삼아 시작한 말이 씨가 되어 4월쯤 선배, 나, 디자이너 총 3명의 스타트 멤버가 구성되었다.
결국 디자이너는 우리와 맞지 않아 함께 하지 않게 되었고, 5월 16일부터 사업 아이템을 찾고 시장조사를 시작했다. 선배는 항상 "우리 본인이 잘하는 일을 하자, 잘하는 걸 잘하자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스킨케어 제품을 했으면 한다는 선배의 의견이 있었고, 6개월간 식품업계에서 일을 하면서 나 역시 내가 잘하는 뷰티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뷰티시장은 과포화 상태였고, 다양한 이유에서 우리가 쉽게 도전할 수 없었다.
브랜드를 론칭하고 제품을 제작하여 판매한다는 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니까, 그렇게 아이템을 생각하던 어느 날, 그렇게 우리는 운명처럼 반려동물 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렇게 일 벌이기 좋아하는 두 사람의 스타트업 도전이 시작되었다. 서브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말도 필요 없는 정말 멘땅에 헤딩! 퇴근 후 반려동물 업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PC방에서, 주말에도 PC방에서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PC 방도 갈 수 없는 상황이 왔을 때는, 선배네 비닐하우스 밖에 차를 새워두고 차 안에서 노트북으로 해외 언택트 박람회를 보기까지..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참 재밌었던 순간이고 열정이 가득해 무서울 게 없었던 것 같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열정, 낭만, 패기 그 자체인 선배는 모든 과정과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 속에서 좀 고생하면 어때, 젊은 우리가 못할게 뭐 있어 - 라는 생각으로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이성적이고 플랜과 기획이 확실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나에게 선배의 저런 모습들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내려가기 전 무서움과 즐거움 설렘 이 함께하는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30살 더 이상 물러설 게 없는 나이라 생각했고, 선배라는 사람을 믿고 따라가기로 한 것이기에 내가 왜 필요한 건지, 처음 아이템이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의사가 있는지, 다양한 문제들이 생기는 부분에서 어떻게 해갈 건지... 등 매일 같이 대표 듀스 101 (이라고 표현했던)이라는 말로 선배의 역량과 진심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했었다.
지금 선배는 어엿한 법인 대표이사가 되었고, 나는 후배에서 그렇게 첫 직원이자 창립 멤버가 되었다.
팀장에서 막내로, 그리고 창립멤버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 순간과 앞으로 치열할 스타트업 라이프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