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당신은 지금 누구와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by 황규진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부러워하는, 세상이 인정한 완벽한 연인의 모습. 어머니께 효도하는 착한 아들이고,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신뢰받는 동료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든든한 조언자이고, 편의점에서도 알바생에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빼먹지 않는 사람이다.


그 완벽했던 시작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당신과 대화할 때만큼은 휴대폰을 뒤집어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 약속을 잡을 때도 "언제가 좋으세요?"라고 먼저 물어봤고, 당신이 이탈리안 음식을 좋아한다고 하자 미리 괜찮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다.


카톡 답장도 빨랐다. "밥 먹었어?"라는 간단한 안부도 빼먹지 않았고, 데이트가 끝나면 "집에 잘 도착했어?"라는 메시지가 어김없이 왔다.


당신이 회사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고 하면 "정말 힘들겠다"며 공감해 줬고, "주말에 영화라도 보면서 스트레스 풀자"라고 자연스럽게 제안했다.


몇 달 지나면서 미래 이야기도 나왔다. "나중에 결혼하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아이는 몇 명 정도가 좋을까?" 이런 대화를 나누며 당신은 확신했다. '바로 이 사람이구나.'


그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의 메시지 알림음만 들려도 가슴이 뛰었고, 데이트 전날 밤엔 뭘 입을지 고민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할 때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첫 번째 금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이상한 감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데이트 중에 그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면 대화를 멈추고 10분이고 15분이고 통화했다. "미안해, 엄마가 몸이 안 좋으셔서"라고 설명했지만, 들어보면 그냥 저녁 메뉴를 묻는 내용이었다.


주말 계획을 세울 때도 그랬다. 당신과 전시회를 보기로 했다가도, 어머니가 "같이 마트에 가자"라고 하면 "다음 주로 미뤄도 될까?"라고 양해를 구했다.


처음엔 효자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벽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신이 "오늘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는데, 그는 "응, 그래"라고 답하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곤 5분 후에 "아까 뭐라고 했지?"라고 되물었다.


손은 잡고 있는데 마음은 전혀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힘들다고 말하면 "너무 생각하지 마"라고 대충 넘어갔다. 회사에서 동료와 갈등이 있어서 속상하다고 하면, "그런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마"라는 식으로 한 줄로 정리해 버렸다.


당신이 원한 건 해결책이 아니라 위로였는데, 그는 그걸 몰랐다.


신기한 건 어머니의 작은 감기에는 하루 종일 걱정한다는 점이었다. "엄마가 기침을 하시네, 병원에 가보라고 해야겠다"며 몇 번씩 안부 전화를 드렸다.


우선순위의 발견

"이번 주말에 뭐 할까?"라고 물으면 "친구들이랑 축구하기로 했어"라고 답했다.


어머니와의 쇼핑,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 당신과의 데이트는 언제나 다른 일정들 사이의 빈 시간에 끼워졌다.


처음엔 사교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구나.' 하지만 점점 당신이 그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검열의 시작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당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좋은 남자였으니까. 친구들도 "그런 사람 어디서 찾냐"며 부러워했다.


그의 어머니도 당신을 좋아하셨다. "우리 아들이 좋은 사람 만났네"라며 반겨주셨고, 명절엔 선물도 챙겨주셨다. 친구들도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겉으로는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연애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어가면서 주변에선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 이상한 감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 표현하기 어려운 답답함.


감정을 누르는 법

외로움을 느끼면 '연애하면서 외로울 게 뭐야'라고 자신을 달랬다. 서운함이 올라오면 '사람마다 표현 방식이 다르니까'라고 이해하려 했다.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 같다'며 자신을 탓했다.


'사랑이란 원래 이런 거겠지.'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나도 부족한 게 많은데.'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설득해 왔다.


하지만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서서히 쌓여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나

그의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면서, 원래 당신이 가지고 있던 목소리는 작아졌다. 그의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모습, 그의 친구들이 인정할 만한 연인의 모습을 연기하느라 지쳤다.


정작 진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날 밤,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이 관계에서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당신의 직감은 이미 진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단지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웠을 뿐이다.


이 책은 당신에게 성급한 답을 주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거나, 당장 관계를 끝내라고 조언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과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대신 이 책은 하나의 정직한 거울이 되고 싶다. 당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그 관계 속에서 조금씩 사라져 간 당신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나침반 역할을 하려 한다.


이 책에서 다룰 '착한 아들이라는 가면을 쓴 내현적 나르시시즘'은 매우 특정한 유형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깊은 상처와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의 인정 없이는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없고, 진정한 친밀감을 두려워한다.


모든 내용이 당신의 상황과 100%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이론보다도 복잡하고 개별적이니까.


중요한 것은 상대를 성급히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당신이 느껴온 혼란의 본질을 이해하고, 무엇보다 상처받은 당신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당신이 느낀 그 이상한 감각들, 설명할 수 없었던 외로움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답답함 들은 모두 정당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당신의 내면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이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경고음이었다.


당신이 예민한 게 아니다. 당신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건강한 관계에서는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것들 - 진정한 관심, 정서적 교감, 상호 존중 - 이 부족했을 뿐이다.


당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관계의 진짜 모습을,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잃었던 당신 자신을 다시 만나는 여행을 시작해 보자.


때로는 아플 수도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마주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는 것만이 진짜 자유로 가는 길이다.


상처받은 자신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 온전한 당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이 책이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