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그리고 일주일

그림 있는 이야기

by 배추흰나비

모임에 나간 남편이 집에 오지 않았다. 좀 늦겠거니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가 새벽 3시가 지나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늦어도 새벽 3시 전에는 들어온다는 우리들의 규칙이 깨졌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야 친구야, 술이야-늦는 날도 참 많았었다. 나도 그냥 자면 될 텐데 굳이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아야만 잠이 들었으니 이만저만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가씨 때 회사 회식자리에서 아내들의 전화를 받고 궁색한 변명을 해대는 사원들을 보며 나는 결혼해도 늦은 밤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정해진 새벽 3시. 내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에도 3시가 되면 내일을 위해 어떻게든 자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 대기음이 지나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기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남편이 참석한 모임은 근 40년이 넘은 어릴 때 친구들 모임이다. 10명의 모임원을 두고 있으나 오늘 누가 참석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꼭 참석할 것으로 알고 있는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전화기에 연락처가 있다는 이유로 새벽에 전화하기도 참 곤란한 일이다.


4시가 되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난다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세상 함한 시절이며 나이 든 남자이며 겨울이다. 택시 타고 내려 집 앞에서 자고 있다가 얼어 죽은 것은 아닌지(나가 봤으나 아니다), 친구 들과 술을 먹다가 싸움이 벌어져 경찰서에 잡혀간 건 아닌지, 집에 오는 길에 몹쓸 사람들을 만나서 두들겨 맞고 어디 잡혀가 통장 비밀번호를 불고 있는 건 아닌지. 상상 속에서 남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 4시가 되도록 전화 한 통 없을 리가 없다. 나는, 전화만 하면 2박 3일 여행을 간대도 보내주는 사람이다.


5시 반이 되어 거실을 서성이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왔다. 안심과 분노가 동시에 솟구쳤다. 평소라면 일어날 시간에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뭐 하다가 연락도 못했냐고 소리를 빽 지르며 시간별 거취에 대해 읊으라고 했다. 남편은 모임에서 술을 마셨고, 당구를 한게임 치러 갔으며, 당구에서 이긴 사람이 술을 한잔 더 사기로 해서 마시러 갔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당구를 또 치러 갔고, 해장국을 먹고, 또 당구를 치러 갔다가 이제 그만 집에 가시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시간이 이미 무척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고 집에 왔다-고 했다. 자, 그럼 같이 있던 친구 이름을 대라고 하자 누구누구랑 같이 있었다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해봐라-했더니 나를 쳐다본다.


들어가서 자


무슨 이야기를 더 할까. 말하자면 놀다 정신 팔려서 집에 연락 못했다는 것 아닌다. 불과 일주일 전 결혼 30주년 기념일이었다. 딱 일주일 전에.

이내 드르렁 소리를 내뿜으며 잠이 들어버린 남편을 보자니 참 별일을 다 겪는다 싶다. 정신줄을 놓아도 이렇게 놓을 수가. 노는 중간에 집에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단다. 당구장에서 까이고 나서야 핸드폰을 보니 나에게 전화가 와 있더란다. 흠.


이미 서로 너무도 알 수 있는 시간인 30년 하고도 일주일을 함께 살았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보다. 밤새 친구들과 놀다가 아침에 들어오는 그 열정이 참 부럽다. 나는 못한다. 무언가를 그렇게 열렬하게 좋아하거나 추구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미치도록, 정신이 쏙 빠지도록 좋아하거나 추앙했던 적이 있었던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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