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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호 Oct 04. 2019

박근혜를 탄핵시킨 힘

민심은 천심인가?



"말도 안 돼요. 범인을 그들의 친구들이 재판하다니."


그는 신문에 실린 오사마 빈 라덴이 턱수염을 기른 배심원 12명 앞에 서 있는 만화를 보여주었다.


"그들이 과실치사로 유죄라고 생각해요?" 내 질문은 그를 자극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기술적인 세부사항을 물고 늘어지는 전형적인 미국식 꼼수로 받아들였나 보다.


"그게 무슨 뜻이든 그들은 유죄입니다."


"어째서요?"


"그들이 어린 소녀들을 죽였으니까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건 사고였어요."


"상관없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아야 했어요."


"하지만 왜? 만약 그게 사고였다면."


"국민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요."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지만, 그의 견해는 대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탱크를 박살 내는 가수 싸이


심지어 가수 싸이는 이 때문에 무대에서 장난감 미군 탱크를 박살내기까지 했으며, 나중에 미국에서 유명해졌을 때 이러한 행동을 해명해야 했다.


한국식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이와 같은 대중의 정서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병사들은 유죄였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패턴대로라면 병사들이 유죄 선고를 받았더라도 머지않아 대중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후에 석방될 것이었다.


(p.327~328)




그녀의 급속한 몰락은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법보다 중요한 것, 관계 당사자들로 하여금 그녀의 제거를 승인하도록 부추긴 무언가가 몰락을 촉발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민이 분노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피플 파워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앞으로 뛰쳐나와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야수로 변모한다.


한국인들은 이 야수를 "민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영어 번역이든 한국말이든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대중, 군중 같은 더 정확한 이름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세계에서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 야수가 전적으로 심원하고 긍정적인 존재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전달하지 못한다.


(p.415~416)




오늘 소개할 책은 마이클 브린의 [한국, 한국인]이다.




저자인 마이클 브린은 <가디언>, <더 타임즈>, <워싱턴 타임즈> 등에서 한국과 북한 담당기자로 활약하였으며, 주한 외신기자 클럽의 회장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36년 거주했다 (작년에 나온 책에 36년째 살고 있다고 쓰여 있으니, 올해까지 여기 살고 계시다면 37년 되시겠다).


책은 두껍다. 500여 쪽에 달해 묵직하다. 1부 <한국인은 누구인가>부터 5부 <미래 한국을 말하다>까지, 어쩌면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야기했을 때 아주 날카롭게 대립할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인이 아니니까, 어떤 편향성에 휩쓸리지 않고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한국어의 높임말이 특별하다는 사실은 높임말이 없는 외국어를 접하게 되었을 때 깨닫게 되듯이, 외부의 시선으로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한국의 이야기는 성향이 다른 한국인들끼리의 지겨운 논쟁보다는 한번 더 귀 기울여 듣게끔 하는 것이 있다.


게다가, 기자로 36년을 한국에서 생활했다니 무작정 '외국 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한국에!' 따위의 반론을 제기하기도 힘들다.


내가 서른 살이니 단순히 6년의 차이인가? 그렇지 않다. 태어나서 아무런 자각도 없이 살아온 어린 날들을 포함한 30년과, 다 자라서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넘어와 살아온 36년이다. 그의 한국에 대한 시선과 통찰은 새겨들을 만한 가치와 권위가 있다.


이 책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소개하는 것은 무리이고 책 리뷰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 4부 <한국사회와 민주주의>의 내용을 앞에서 조금 살펴본 것이다.


이 내용은 집단 광장 정치가 판치는 지금의 상황에서 한번 되새겨볼 만한 부분이 있기에 소개한다.




좋은 곳에서 평안하기를


글의 도입부에서 첫 번째로 소개한 내용은 다들 알다시피 미군 장갑차에 한국의 두 여중생이 깔려서 사망한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다.


어릴 때였지만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며 시위가 일어났던 것을 기억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내용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다.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의 플래카드를 들고,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이 두 사건 이후 공통적으로, 저자는 '서울에서 이를 보고해야 하는 외국의 외교관과 언론인들은 매우 어리둥절해했다'라고 서술했다.


국민의 분노.


정확한 법리적 절차나 사실관계보다 앞서는 심원한 것.


박근혜가 실제로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본국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책의 내용을 다시 조금 옮겨본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처럼 법에 기초했었다면 조사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며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는 데는 2년이 걸렸음), 박근혜는 임기가 끝나는 2018년 2월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p.415


물론 박근혜에게 무언가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탄핵되었을 때 아무것도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1백 일의 특검 수사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p.417


이는 공공의 정서에 대한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이기도 하다. 공공의 정서는 심원한 감정이다. 사소한 세부사항에는 관심이 없다. 일단 야수가 밖으로 나온 후에는, 당국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여 그녀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했다.
 p418


한국에서는 국민정서라는 개념이 이례적인 힘을 갖고 있다. 국민정서는 여론과 국민보다 상위에 있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민주주의의 생명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p.481


이제 한국에는 국민 대다수가 원하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라도 때로는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말이 거리시위나 온라인 항의에 의해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며, 안정된 민주주의는 대의제도와 법치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p.482




내가 잔혹한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모함을 받았다고 하자.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해도, 검찰은 정확하게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보다 얼마나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는지,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과 공포에 떨었겠는지, 사체를 또 얼마나 잔인하게 처리했는지 따위의 자극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나에게 당장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들불처럼 국민들이 들고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보다는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희생자와, 자극적인 언론 보도용 소재가 필요할 뿐이다.


어느새 다른 사건에 잊히고, 지난한 세월을 보내며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이미 피폐해진 내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영화 <트루먼 쇼>를 보는 것 같다.


"다른 사건은 또 뭐 있지?"


현재 대한민국은 법과 질서와 절차를 모두 초월하는 민심이 아무렇게나 분출되고 있으며, 그것을 통제할 힘도 법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의 정치권력이 그것을 '선택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주 큰 걱정과 관심을 가지고 요즘의 이슈들을 주시하고 있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민심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민심주의 종주국이라 자부해도 될 듯하다).


'반일 종족주의' 리뷰에서도 살펴보았듯 일본 제품 불매, 일본 여행 금지, 끝까지 가 보자는 식의 극단적인 반일 감정 분출은 집권여당과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런 전국민적 반일 감정을 '거스를 수 없는 민심'이라고 발판 삼아 끝까지 일본과 강대강 대결을 몰고 가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외교적 입지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확한 사실관계 규명과 이성적 대응이 아닌 감정적인 '민심' 표출은 외국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며, 국제 여론전에서도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작년 미국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 과정에서도 국민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1조 원 이상은 부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민심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이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궁금하다.


국내 내수용으로 쓰기에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부끄러운 개념을 국제 외교에서 꺼내 들다니 대한민국 정부에는 이런 아마추어 인사들밖에 없는가?


한 가지 더


박근혜 대통령은 비록 잘못을 저질렀을지언정 청와대에서 물러날 만한 중대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었음에도 이런 국민들의 집단 정서에 굴복했고 결국 탄핵당했다.


민심주의를 뚫고 나아갈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어떠한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민심의 분출은 국정 운영의 연료로 삼고, 불리한 것은 틀어막고 평가 절하하고 있다.


며칠 전 서초구에서 있었던 조국 장관 수호 집회는 참가자 수를 비상식적으로 부풀리면서까지 안고 갔으며, 어제(3일) 있었던 광화문 집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외면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조국 수호 집회는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 광화문 문 대통령 퇴진 집회는 동원되어 끌려 나온 일당쟁이 용역꾼으로 치부한 것이다.


그들이 받들어야 할 민심은 당연히 전자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의 근간이 되는 것은 법치주의다.


백만천만 국민이 모여 목소리를 낸다 해도 법에 어긋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며, 단 한 명의 사람이 피켓을 들고 항의하고 있어도 법에 부합한다면 올바르고 정의로운 소리다.


어제 광화문 집회의 기억을 다시 꺼내 본다.


홍준표 전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에 대해 조목조목 일러 주었다.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지위와 정통성 포기'부터 시작되는 14분간의 연설을 통해서다.


홍준표 10.3 광화문 연설


대통령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헌법 위반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다.


'문 대통령의 헌법 및 법률 위배 사실'은 '광장에 몇십 몇백만 명의 국민이 모였다는 사실'보다도 더 합리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다


그런 확실한 무기를 가지고 '촛불 국민'이란 허상의 방패로 자신들을 지키는 이번 정권을 맹렬히 공격하지 못하는 야당 지도부의 역량은 틀림없이 함량 미달이다.


하지만 민심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는 '촛불 국민'이 최고의 방패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야당 지도부와 보수 인사들은 어째서 어제 광화문에서 수백만 국민들의 '민심'이라는 지원사격을 받으면서도 '민심에 기반한' 정부를 상대로 제대로 투쟁하지 못하는가?


내가 어제 집회에 참석한 것도 '광장에 모여 민심을 분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기보다, 보수 진영이 법치를 기반으로 해 제대로 싸우질 못하니 '민심'이라도 얹어 주어 도와주어야겠다는 자조적인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국 노래자랑 하듯이 연단에 올라 마이크 붙들고 듣기 좋은 소리만 잠시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야당 지도부의 모습에서 마지막 한 점 남아있던 기대는 모두 무너졌다.


머리도 빡빡 밀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던 황교안 대표는 대낮부터 도대체 어딜 갔는가?


사람이 너무 많아 다른 곳에서 집회를 이어가던 황 대표를 내가 못 본 것이라 믿고 싶다.


결론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지금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민심주의를 극복할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현 집권 여당은 선택적으로 너무나 잘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 우파 진영은 '무능함', 진보 좌파 진영은 '교활함'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안정된 민주주의는 대의제도와 법치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이 너무나도 와 닿는다.


이미 한국인들의 DNA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내린 민심주의를 스스로 극복해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냉철한 사유와 통찰 없이 이리저리 선동되어 뿜어져 나오는 민심은 그를 이용하는 정치 세력들에게 스스로 먹잇감이 되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하나의 국민들이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내가 나의 작은 브런치 공간에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는 이유이다.


나의 의견을 보고 반감을 느낄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오늘 내가 소개한 마이클 브린의 [한국, 한국인]을 읽어 보며 한국인의 집단 정서에 관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물론 최근의 이슈는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내가 직접 나서 설득하지 못하고 책을 쓴 저자의 권위를 빌어 떠넘기는 것이 비겁하고 마음이 불편하지만, 나의 부족한 지식으로 섣불리 '민심'을 자극할 수 없으니 한 발짝 물러난다.




책에는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남북관계, 한류 같은 다양한 문제에 관해 독특한 저자의 견해를 볼 수 있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비판적으로 받아들여볼 만한 여지도 있는 재미있는 책이므로 추천한다.


아마 TV프로에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이 나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비슷하긴 한데 굉장히 깊이 있는 이야기를 외국인에게 듣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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