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의리

[명리 수필: 기토가 경금을 신뢰하는 이유]

by 구덕골 이선생
[파브리아노워터칼라, 신한 물감, 모작 과정]

'천명'이란 단어를 보면 교생 실습 때가 떠오른다.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던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 아직도 교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나요"라며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나는 그 말에 손을 들어 긍정의 화답을 보냈다.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 어리숙한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수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다. 나는 아이들과 만나는 게 즐겁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표현력에 도움을 주니 뿌듯하다. 청소년들은 성인에 비해 아집이 적으니 변화 가능성도 매우 크다. 그러니 성장 패턴을 분석하고 기대치를 달리하면 적지 않은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강적은 있다. 나의 경우 '학습에 큰 뜻이 없으면서 고집이 센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어렵다. 만약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경우라면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경험이 습관이라고, 투자한 시간에 비해 결과물이 좋으니 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잔소리를 해봐야 수용하는 부분은 적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힘들다.


[파브리아노워터칼라, 신한 물감, 모작 완성]
경금(庚金)은 외강내유 스타일로 도전 정신이 뛰어나다. 의리와 명분이 중시하고 책임감이 강해 주변 사람들을 돕는다. 다만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고, 아니다 싶을 땐 단칼에 자른다. 또한 모든 일을 감당하려는 희생정신 때문에, 기회주의자가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이용당하기 쉽다.


나에게도 강적은 여럿 있다. 그중 A는 나의 첫 번째 강적이다. 그는 매주 수업에 참여하면서도 과제는 뒷전이었다. 막상 테스트를 해보면 노력에 비해 결과물은 나오니 놀랄 따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매사에 솔직한 것. 핑계나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지 않고, 특별한 아닌 이상 결석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와 년의 시간을 공유한 끝에 미국으로 떠났다. 2년이 지났을까.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긴 장발을 한 A가 커피를 들고 장대처럼 서있는 게 아닌가.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한국에 오면 어김없이 커피를 들고 벨을 른다. 언젠가 "친구들 만나기도 바쁠 텐데"라고 물으니, "당연히 와야죠"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A는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판단력도 빠르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 싶으면 과감히 정리한다. 한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려는 것인지, 솔직하고 대범한 행동에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나 타국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게 뻔하니, 웃음 뒤에 숨겨진 내적 고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파브리아노워터칼라, 신한 물감, 모작 완성]

"선생님, 요즘도 고등학생 가르쳐요?"

"고등학생이 글 쓸 시간이 어딨냐.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지"

"에이~ 난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니까요. 놀러 왔는데? 나는 말하고 글 쓰는 게 재밌던데요"

"진짜? 재밌었다고?"

"진짜예요. 미국에서 글쓰기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데요"

"다행이네. "

"선생님~ 사람은 바쁜 게 좋아요. 포기하지 말고 글쓰기 수업 계속하세요."


A는 글쓰기 수업을 계속해야 하나 의구심이 들 때쯤 나타났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말썽쟁이 꼬맹이가 다 큰 청년이 되어 돌아온 것인데, 키만 큰 게 아니다.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줄 정도로 성숙한 것.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결단력이 뛰어났던 A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부모님한테 여쭤봐서 태어난 시간을 알았는데, 혹시나 미국 오기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메시지 보냅니당"


나의 의구심을 정리해 준 A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얼마 전 톡으로 사주를 보내왔는데, 나에게 또 하나의 과제를 던져준 것. 군 입대를 앞둔 A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신념과 의리를 중시하는 그에게 특별한 당부는 필요 없지 싶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니, 부디 건강히 돌아오라는 인사말을 전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