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 수필: 기토가 경금을 신뢰하는 이유]
'천명'이란 단어를 보면 교생 실습 때가 떠오른다.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던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 아직도 교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나요"라며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나는 그 말에 손을 들어 긍정의 화답을 보냈다.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 어리숙한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수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다. 나는 아이들과 만나는 게 즐겁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표현력에 도움을 주니 뿌듯하다. 청소년들은 성인에 비해 아집이 적으니 변화 가능성도 매우 크다. 그러니 성장 패턴을 분석하고 기대치를 달리하면 적지 않은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강적은 있다. 나의 경우 '학습에 큰 뜻이 없으면서 고집이 센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어렵다. 만약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경우라면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경험이 습관이라고, 투자한 시간에 비해 결과물이 좋으니 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잔소리를 해봐야 수용하는 부분은 적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힘들다.
경금(庚金)은 외강내유 스타일로 도전 정신이 뛰어나다. 의리와 명분이 중시하고 책임감이 강해 주변 사람들을 돕는다. 다만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고, 아니다 싶을 땐 단칼에 자른다. 또한 모든 일을 감당하려는 희생정신 때문에, 기회주의자가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이용당하기 쉽다.
나에게도 강적은 여럿 있다. 그중 A는 나의 첫 번째 강적이다. 그는 매주 수업에 참여하면서도 과제는 뒷전이었다. 막상 테스트를 해보면 노력에 비해 결과물은 나오니 놀랄 따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매사에 솔직한 것. 핑계나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지 않고, 특별한 게 아닌 이상 결석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와 수년의 시간을 공유한 끝에 미국으로 떠났다. 2년이 지났을까.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긴 장발을 한 A가 커피를 들고 장대처럼 서있는 게 아닌가.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한국에 오면 어김없이 커피를 사들고 벨을 누른다. 언젠가 "친구들 만나기도 바쁠 텐데"라고 물으니, "당연히 와야죠"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A는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판단력도 빠르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 싶으면 과감히 정리한다. 한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려는 것인지, 솔직하고 대범한 행동에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나 타국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게 뻔하니, 웃음 뒤에 숨겨진 내적 고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생님, 요즘도 고등학생 가르쳐요?"
"고등학생이 글 쓸 시간이 어딨냐.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지"
"에이~ 난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니까요. 놀러 왔는데? 나는 말하고 글 쓰는 게 재밌던데요"
"진짜? 재밌었다고?"
"진짜예요. 미국에서 글쓰기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데요"
"다행이네. "
"선생님~ 사람은 바쁜 게 좋아요. 포기하지 말고 글쓰기 수업 계속하세요."
A는 글쓰기 수업을 계속해야 하나 의구심이 들 때쯤 나타났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말썽쟁이 꼬맹이가 다 큰 청년이 되어 돌아온 것인데, 키만 큰 게 아니다.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줄 정도로 성숙한 것.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결단력이 뛰어났던 A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부모님한테 여쭤봐서 태어난 시간을 알았는데, 혹시나 미국 오기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메시지 보냅니당"
나의 의구심을 정리해 준 A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얼마 전 톡으로 사주를 보내왔는데, 나에게 또 하나의 과제를 던져준 것. 군 입대를 앞둔 A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신념과 의리를 중시하는 그에게 특별한 당부는 필요 없지 싶다.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니, 부디 건강히 돌아오라는 인사말을 전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