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끝까지 다 쓰고 버려
by
장주희
Apr 20. 2023
물건이 흔하면 귀한 줄 모른다구요.
한 때 저희 회사에는 굴러다니는 펜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쓰고 싶은 만큼 갔다 쓸 수 있으니까
쓰던 펜이 없어져도 어디 있는지 찾기보다는
새로운 펜을 꺼내 쓰고, 없어지면 또 꺼내 쓰고
필기류가 아쉽지가 않았지요.
그러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흔하던 펜이 귀해지기 시작했어요.
책상 위에 돌아다니던 펜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사람들이 이제는 펜 하나를 잡으면 꽤 오래 씁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펜이 어제부터 잘 안나오네요.
고장났나? 흔들어도 보고, 꾹꾹 눌러도 보고했는데요.
액이 없습니다.
이야~ 혼자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끝까지 알뜰하게 다 쓴 것도 대단하지만
다 쓰도록 잃어버리지 않은 제 자신이 더 대견스럽네요.
그러고 보면 저를 스쳐간 물건 중에
제대로 대접받고 쓰여진 물건들이 많지는 않은듯 합니다.
제 수명이 다하도록 알뜰하게 쓰고 버린 물건들보다
중간에 싫증 난다고 한 쪽에 치워두고
새 것에 밀려 구석에 쳐박히고
그러다가 멀쩡한 채로 그냥 버려진 물건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미안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얘기하듯이 마음속으로 그 물건들에게 사과를 건네고 싶어집니다.
그 물건들 탓은 아닌데 그런 대접을 받다니, 맘 고생들을 많이 했을 겁니다.
" 하지만 너희들만 그런건 아니야.
우리, 사람들도 그런 취급을 받을 때도 많이 있어"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물건들을 위로해 주다보니
사는 게 정말 슬퍼지네요.
볼펜만큼 알뜰하게 쓰이지 못하는 사람들.
볼펜보다 나을 것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대접받고, 쓰임새에 맞게 제대로 쓰여지지 못하는 것은
볼펜만은 아니구나 생각하니 입맛이 영 씁쓸합니다.
keyword
대접
사람
12
댓글
2
댓글
2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장주희
CBS 아나운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적'인 말하기를 꿈꾼다. CBS <올포원> ,<가스펠아워>진행중. 한국코치협회 KPC 인증코치. 저서 <들리는 설교>
구독자
11
구독
밤 반 탈출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