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어떻게 지내요 _ 시그리드 누네즈

by 루바토






탄생은 임의적이며, 최소한 두 명 이상의 관여와 개입이 일어난다. 그러나 죽음은 개별적이어서 한 인간을 완전한 고독에 이르게 한다. 완전한 고독은 정말 ‘고독’하기에 누군가 한 명쯤은 옆에 있어 준다면 좋지 않을까? 유대감이 높은 가까운 누군가가.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옆의 한 사람. 혈족이나 친족이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 본다. 주어도 되어보고, 목적어에 나를 넣어 보기도 한다. 과연 그 ‘옆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또는 당신들이.

답을 할 수가 없다. 아직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겠지.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가까운 타인에 대해서도. 누군들 생각해 보겠는가.


죽음에 가까이 직면해 본 사람이 아니면 감히 예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책 속의 주인공에 교감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경험이야 말로 독서의 큰 즐거움이다.


½ 지점까지(어쩌면 3부를 제외한 전부)는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을 때 느꼈던 정서가 나를 지배했다. 문장이 날렵하고 멈춤이 없다. 번역의 힘 같다. 독자의 호흡에 따라 어휘와 문장 구조가 잘 배려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읽기가 쉽고, 이해가 빠르게 된다.

위트는 속도다. 얼마나 재빨리 파악되느냐에 따라 위트의 강도는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렇다고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소재로 위트와 재미로만 풀면 그저 그런 블랙코미디로 끝나 버릴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지적 유희와 화자의 고뇌는 독자를 여러 갈래의 생각으로 이끌 것이다.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이라는 단편소설도 (가까운) 타인의 죽음을 조력하는 이야기가 소재로 쓰인다. 결은 다르게 흘러 가지만, 오래전에 이미 비슷한 소재를 소설로 풀어낸 대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너무 늦게 안 내가 더 놀랍다.)

결말은 둘 다 흥미롭다. ‘어젯밤’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절대 비극으로 끝났을 것 같고, ‘어떻게 지내요’는 마침내, 모두가 위안을 얻게 될 것 같다. 그럴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소설이라고 몰아가는데 전혀 아니다. 여성소설이 어떤 장르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페미니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동의하기 힘들다. 아주 ‘보편’적 이야기다. 독자가 ‘인간’이 지켜온 보편적 가치의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