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잃은 개를 위한 . . .

맡겨진 소녀 _ 클레어 키건

by 루바토


숲을 헤매다 돌아오면 자신도 모르는 상처를 나중에야 발견하곤 한다. 마치 그것처럼 소녀는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유년의 생채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스위트 홈’이라는 평안을 느껴보지 못한 채 어딘가에 기약 없이 맡겨지고 있는 운명이다.


소녀는 친척 집으로 가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던져진 소녀는 자신의 처지와 바람 사이를 오가며 상상한다. 소박한 희망을 품는 마음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이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불안하지만 설레는 심리 상태를 잘 묘사했다. 긍정과 부정을 오가면서도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마음 같은 것.


제목이 ‘맡겨진 소녀’라서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나 고난 극복기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성장소설인 것은 맞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 서로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는 '치유소설'로 나는 읽었다.


소설의 피날레가 압권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야기는 흐트러짐 없이 끝을 향해 달린다. 상처 입은 영혼들의 유대는 잃어버린 것을 서로 채워줄 때 자연히 발생한다. 그건 의도한 것이 아니다. 영혼을 둘러싼 냉기를 인위적으로 녹여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짙은 유대감'이다. 상실의 냉기가 물러난 자리는 산뜻한 온기가 스며들 것이다. 사랑, 안도, 위로, 자애, 용서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가 받은 위로보다, 킨셀라 부부가 가진 상실의 아픔이 치유되는 과정이야말로 이 소설이 주는 최고의 감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소설을 읽는 내내 킨셀라 내의 ‘이름 잃은 개’에게 연민을 느꼈다. 킨셀라 부부에게는 고통을 안겨준 원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친구’이자 자신을 돌봐주던 주인을 잃은 개야말로 가장 큰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의 끝 장면에 이어서 에필로그를 써 붙인다면,

킨셀라 아저씨가 따뜻한 음성으로(아들이 매일 불러줬을) 개의 이름을 ‘돌려주고’ 다정히 안아주면 좋겠다.

유대감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을 용서하게 되고, 치유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도 치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해도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 없는 일. 이맘때 비슷한 사연의 이야기를 들으면 “세월호”가 떠오른다. 생판 남인 나도 아이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슬프지만, 10여 년 견뎌냈을 부모들은 어떠했을까? 킨셀라 부부처럼, 어떤 인연이나 연유로든지 아픔을 보담은 유대가 나타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