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고 투명한 경계를 허무는 힘

이처럼 사소한 것들 _ 클레어 키건

by 루바토

짧은 중편소설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결말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무척 은유적이다. 처음 읽을 때 어떤 결핍 같은 것,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계속 맴돈다. 문장이 간결해서 편하게 읽었지만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나중에 옮긴이의 후기를 보고 이유를 조금 이해했다. (번역할 때 참고할 만한 내용을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설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읽을 때는 톺아보며 음미했더니 훨씬 풍부한 소설이 되었다. 사실 처음 읽을 때도 멋진 소설이었다.


클레어 키건은 절제력이 대단하다. 꽉 채워 설명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독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방식이다. 독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고, 소설의 남은 공간을 스스로 채우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심심하게 보여주고 있으나, 등장인물의 대화나 생각을 통해 여러 가지를 암시한다. 작가가 직접 밝혔듯이 배경묘사도 은유적으로 활용한다. 한번 읽어서 모두 파악하기는 힘들다. 두 번 세 번 읽을 때 알아챌 수 있는 것들도 많다. 다행스럽게도 짧은 소설이라 여러 번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은유적인 글이지만 문체는 건조하고, 묘사는 화려하지 않다. 희한한 매력이다. 중천의 태양에도 어슴푸레한 아일랜드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글맵씨다.




펄롱의 태생과 어린 시절은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을 닮았다. 계통 없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미래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벗어나 현재의 펄롱이 있기까지 지탱해 준 것은 주위의 “사소한" 배려와 구원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그처럼 '사소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심연에는 - 스스로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그들의' 배려와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역사는 불연속 한 결정들의 총합이다. 각각의 결정은 당시에 어떤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 대단한 인과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과도한 서사가 개입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고뇌에 찬 결단은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다. 펄롱의 결정은 '사소한' 것이다. 그가 살아온 흐름대로 내린 결정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책의 뒷면에 (광고문구처럼) 적힌 거창한 설명이 거슬린다.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한 소시민을 둘러싼 세계’


클레어 키건은 이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펄롱을 고뇌하는 영웅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테니.

오히려 침묵과 용기의 경계면은 두께가 없고 투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펄롱이 아니라 누구라도 세라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는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선 소시민의 고뇌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내면의 허물어야 할 ‘경계’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죽음과 삶, 절망과 희망, 침묵과 용기, 연대와 고립 … 같은 얇고 투명한 경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