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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영 Sep 13. 2020

다시 돌아온 그 섬

2019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Spring 쇼도시마(1)

3년 만에 왔는데 하나도 변한 것 없는 익숙한 페리 안. 출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이젠 허기가 졌다. 아침 비행기를 타러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벌써 7시간 가까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배 안 매점에서 간단히 우동 한 그릇과 타코야키 1인분을 주문해 남편과 나눠 먹었다. 그 자리에서 면만 데워 국물을 부어주는 별 것 없는 우동과 전자렌지로 데워서 나오는 타코야키지만 바다 위에서 뭔가 먹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도착 전까지는 잠시 쉬겠다는 남편을 두고 혼자 갑판 위 구경을 하러 올라갔다. 한 시간 전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그 바다를 달려 섬으로 가고 있다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바다와 먼 곳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나이를 먹어도 바다를 보는 건 가장 신나는 일 중 하나다. 언젠가는 며칠을 바다에서 보내는 크루즈도 꼭 타보고 싶었는데... 온 세계가 문을 걸어 잠근 요즘 같은 상황이 금방 끝날 것 같진 않아 정말 아주 시간이 많이 지나야 이룰 수 있겠지?


타카마츠항을 떠난 지 한 시간, 드디어 쇼도시마 토노쇼항에 도착했다. 섬 손님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듯 항구를 빙 둘러싼 산세와 낮은 건물들,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우리의 숙소 오키도호텔까지, 아, 그리웠다 이 풍경. 3년 만에 돌아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몇 달만 있어도 새 건물이 들어서거나 상점이 바뀌어 낯설게 느껴지는 도시에 비해 이 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익숙한 곳으로 돌아온 듯 마음이 편해지면서, 며칠간은 복잡한 일상은 잊고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리라 다짐했다.


한적한 항구 앞에 우뚝 서 있는 오키도호텔. 덕분에 방 안에 앉아 배가 드나드는 걸 실컷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오후엔 무얼 할까 하다, 세토우치 예술제를 즐기는 대신 쇼도시마의 명소 칸카케이 협곡 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3년 전엔 이 곳을 다른 섬들로 이동하기 위해 잠만 잤던 베이스캠프로만 삼았는데, 이번만큼은 섬 구석구석을 보고 싶었다. 페리 터미널에서 미리 신청해두었던 예술제 패스포트를 수령해서 나오니 정류장에 마침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쇼도시마는 '올리브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일본에서 처음 올리브 재배에 성공한 곳으로, 섬 곳곳에서 올리브 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올리브는 쇼도시마를 대표하는 특산품이자 섬의 마스코트인데, 덕분에 시내버스에도 '올리브 버스'라는 귀여운 이름을 붙어 있었다.


도시가 아닌 만큼 한 번 놓치면 다음 버스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해서 서둘러 올라탔다. 버스를 타는 건 그 지역에 스며든 것처럼 느껴져서 좋다. 직접 운전을 하는 것과 택시를 타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낯선 곳에 갔을 때 택시를 타긴 쉽지만, 버스를 타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도 버스는 그 지역만의 시스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요금은 어떻게 내는지, 내가 가려는 장소와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어떤 이름인지. 오래 그 지역에 살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버스를 타면 중간중간 타고 내리는 현지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행선지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버스를 자주 이용하면 낯선 곳이라도 구석구석 길을 배울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중간 환승을 위해 내린 버스 정류장. '올리브버스'라는 귀여운 그림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드디어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설렘에 키득거리는 동안, 우리가 탄 버스는 언덕을 넘어 높이 높이 올라간다. 버스 종점에는 칸카케이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탑승장이 있는데, 종점에서 내린 건 우리 둘을 포함해 너댓사람 뿐이었다. 탑승장 주변엔 마땅히 볼 것이 없어, 버스를 함께 타고 온 멤버 그대로 얼마 뒤에 도착한 케이블카에 올라탔다.

케이블카를 타니 꽤나 널찍한 공간에 바닥과 천장을 제외하고 360도의 탁 트인 풍경이 밀려든다. 저 멀리 세토우치 바다를 내려다보니 바다 곳곳에 떠 있는 여러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토우치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인 쇼도시마의 위용이 느껴진다. 한참을 바다에 눈을 빼앗겼는데, 케이블카가 올라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가파른 절벽과 푸른 숲이 손에 닿을 듯 스쳐 지나간다. 일본의 아름다운 3대 계곡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이 곳은, 특히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고 한다. 붉게 물든 산과 파란 바다를 함께 볼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눈이 부실 정도다. 언젠가 단풍으로 물든 가을에도 꼭 한 번 와보고 싶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산 중턱에 넓은 평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케이블카로만 올라올 수 있는가 했더니, 산 반대편 도로를 따라 차를 타거나 등산로를 통해서도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다. 케이블카를 이용한 우리들 외에도, 가족 관광객, 학생 단체 그룹도 삼삼오오 전망대 곳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지만 시원하게 펼쳐진 세토우치 바다 모습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전망대 아래 절벽 근처에 동그란 골대 같은 것이 하나 서 있었는데, 기왓장을 던져 구멍을 통과시키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했다. 기와를 파는 매점은 문을 닫은 터라 우리는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던져 보았지만 보기 좋게 실패.. 연못이나 호수에 동전을 던져 넣는 곳도 그렇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광지에 이런 장소들은 빼놓을 수 없나 보다.


원래 계획은 전망대에서 맛있는 것도 먹으며 천천히 즐기다 내려오려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하필이면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고 기념품 가게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종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배가 고프면 작은 일에도 쉽게 침울해지고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내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남편은, 가볍게 둘러만 보고 다시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사진만 몇 장 남긴 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 탑승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애매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내려온 탓에 마을로 내려가는 버스는 이미 떠났고 다음 차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아까운데 멍하니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 내 눈에 들어온 노란 바퀴의 자전거. 서울에서 열심히 타고 다니던 '따릉이'와 비슷한 공유 자전거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 딱 두 대 남아 있었다. 이름은 Hello Cycling. 외국인인데 대여가 될까 반신반의하면서 안내에 따라 어플을 설치하고 가입을 시도했는데, 이메일만으로도 쉽게 가입이 됐다. 결제도 한국 발행 신용카드로 문제없이 해결. 전망대 위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던 배고픔과 힘듦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니! 이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왔던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남편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올라왔던 길을 자전거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느끼고 소리도 질러가며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산 길을 달리는 기분이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신난다. 물론 너무 신나게 달려서 다리가 풀린 덕분에 중간에 한 번 중심을 잃고 넘어져 기어이 상처가 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서울에선 누릴 수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정말 길에 차가 한 대도 안 다녀서 자전거 탈 맛 났던 날

이케다항 근처까지 내려와 자전거를 반납하고, 이제 다시 토노쇼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 자전거를 타다 멈추니, 잠시 잊고 있던 허기가 다시 찾아와 버스 정류소 근처를 둘러보다가 작은 튀김집을 발견했다. 메뉴 중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가츠산도(돈가스 샌드위치)를 사 먹었는데 갓 튀긴 돈가스에, 단짠단짠한 돈가스 소스까지 별 꾸밈없이도 너무 맛있었다. 사실 여행에서 '식(食)'이란 빼놓을 수 없는 건데, 나는 쉴 틈 없이 어딘가 찾아가고 둘러보는 것에만 몰두해서 먹는 걸 자꾸 잊어버린다. 먹으면서 잠깐 쉬고, 내가 머무는 곳을 누릴 여유를 가지는 것. 여행에서, 삶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순간이다.


숙소가 있는 토노쇼항에 도착하자 어느덧 여섯 시가 가까워져 번화가로 이동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쇼도시마에서의 제대로 된 첫 끼는 남편이 좋아하는 라멘으로 정했다. 남편은 언제나 뭐 먹을지 물어보면 면류를 첫 번째로 얘기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면 요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라, 저녁 식사 후보군 중에 라멘을 조금 더 강하게 추천했더니 역시나 거절하지 않았다. 면요리 안 좋아한다더니... 하고 놀리고 싶은 마음은 꾹 누른 채, 구글맵을 따라 걷다가 도로변 아담한 라멘집에 도착했다.


노부부 두 분이 운영하고 있는, 주방을 따라 둘러진 카운터 자리뿐인 평범한 가게. 카운터 앞 높은 단 때문에 살짝 넘겨다볼 수밖에 없던 주방은 도구가 많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오다가다 가볍게 들어와 한 끼 해결하고 갈 법한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라멘과 교자,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맥주까지 주문 완료. 야채가 가득 들어간 바삭바삭한 교자 한 접시는 라멘이 나오기도 전에 뚝딱 사라졌고, 남은 맥주와 라멘은 쉴 새 없이 목으로 넘어갔다. 새벽부터 집 떠나 이 곳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넘기기까지 참으로 긴 하루였다. 생일이니까 거창한 걸 먹을까도 했는데, 우리에겐 이런 평범한 순간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배부르게 먹고 식당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마침 해가 질 시간이라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여행객인지 주민인지 모를 중년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오붓한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을 늦춰 거리를 점점 벌렸다. 그리고 나와 나란히 걷고 있던 남편을 앞서게 하여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다. 2019년의 생일을 낯선 섬마을에서 보내고 있다는 걸 남겨주고 싶어서.


내일은 렌터카로 섬 전체를 돌아보기로 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세토우치 예술제 관람도 시작되는데, 어떤 동네와 어떤 작품들을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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