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인 나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안전띠가 채워져 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게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다. 요즘 같은 높낮이면 아주 탈 만 하다는 생각도 한다.
언젠가 SNS에 이런 중2 같은 말을 했다가 삶이 겁나 하강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떨어지는 느낌에 너무 질려서 ‘이렇게 구별이 없는 인생이라니 날 보고 누가 교회에 다니고 싶겠나’ 분한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구김살 없는 얼굴, 선한 말투. 다 그런 풍요로운 인생에서 자연스럽게 베어 나오는 거잖아’라는 불만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보란 듯이 잘 풀려야 크리스천의 삶 아닌가?
오늘 임테기 두줄 봤어요! 사실 임신 시도는 몇 달 했는데 소식이 없길래. 올 해는 안 주시려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예비하신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Thanks God!!!
함께 청년부 시절을 보낸 교회 친구들의 sns에 임테기 인증샷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너무 잘됐다’는 말은 진심이었지만, 매번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한 교회 ‘인싸’ 친구로부터 ‘우리 교회 누구누구 임신했대’라는 말을 들을 때면 ‘이제 너 하나 남은 거야’라는 하지도 않은 말이 들리는 거다. 서운했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말을 하는 친구에게도 내 상황 아시면서 안 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성경에도 불임으로 고통받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렇고, 난임 여성병원
‘라헬’도 성경 속 불임 여성의 이름이다. 아이를 갖지 못해 서러운 삶을 살았던 ‘한나’의 기도는 유명하다.
내가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최고 수위의 고난은 임신인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이들의 역할이 크다. 그리고 그 일이 ‘나의 일’이 되었을 때는 공포스러웠다. 뭔가 단단히 잘못한 게 있어서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스포를 하자면 이 성경 속 여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의대상이다.)
-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 설령 그렇대도 왜 이렇게 까지 하시지?
- 왜 무엇하나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지?
이런 생각을 거의 매일 했던 것 같다.
이유가 어떻든 나는 당장 내가 피로한 이유를 줄여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SNS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굳이 다른 사람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괴로워하는 것만 없어도 숨통이 좀 트일 것 같았다.
- 인스타는 삭제. 카톡은 알림을 끄고 배경 화면 맨 뒤로 보냈다. 하루 한 번 정도만 흐름만 읽자. 안 읽어도 상관없다. 답답하면 전화한다.
나는 이걸 다이어리에 ‘환경설정의 날’이라고 썼던 것 같다. 스마트폰 메인 화면에는 포털과 웹툰, 금융 앱 그리고 성경앱이 덩그러니 남았다. 평소 즐겨 쓰지 않는 앱이다.
이제 전화 말고는 아무 알림도 오지 않을 조용한 폰에 성경 말씀 알림이라도 뜨게 해두자 싶었다.
그리고 거의 매일 흐림이던 내 마음에 먹구름이
걷히는 일이 일어났다. 성경 앱은 매일 이런 말씀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전 11: 5,6,8)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
-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여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미야애가 3)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7)
난자 채취 후에는 이런 메시지가 왔다.
나는 자궁내막증이 양쪽 난소에 있어 임신이
어려운 케이스였다.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마 5:34)
초음파로 아기집 보기 전 날에는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
나는 이 말씀들이 이렇게 들렸다.
“우연아, 세상살이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어. 이번 일에는 니가 근심을 많이 하는 것 같아 마음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일로 니 장래에 더 큰 소망을 주려고 계획하고 있단다. 다른 것보다 니 마음을 지키고 기도하렴.”
앞서 언급한 성경 속 불임 여성 ‘사라’, ‘라헬’, ‘한나’는 결국 종국에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종국에는’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다음 달에 아이가 생길지 그다음 달에 아이가 생길지 내년에, 혹은 그다음 해에도 아이가 안 생길지 몰랐던 시기에 누군가 이 기간이 ‘은혜’라고 했다 치자. 내가 아주 선명하게 ‘아멘!’ 할 수 있었을까? 그뿐일까? ‘내가 하나님이면 일단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하도록 두지 않았을 거다’라고 말하며 바들바들 떨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히 나는 보통 사람이다.
나한테 ‘종국에는’ 이게 축복일 거라는 전제를 달고
처음부터 다시 해볼래?라고 한대도 나는 이 삶을 선택할 수 없다.
뭐가 어떻든 간에. 난임은 내 잘못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건 벌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제외’된 적이 없다.
지금의 나는 혼자 애써서 되지 않을 만한 일에
마음 쓰는 일이 많이 줄었다. 버티다 보면 변수가 생길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 괜찮다. 변수를 만드시는 분이 내가 신뢰하는 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