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찬 교수의 광고로보는 통신역사]
데스크에서 상당히 손을 봤네요.
오리지널 원고에는 이런 내용이 ^^
연결의 인큐베이터: 김민기와 학전
학전은 문화계에서 마치 벤처기업의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 김 대표는 평상시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못자리 농사다.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독일 뮤지컬을 각색한 <지하철1호선>은 15년이나 흥행했지만, 아동극으로 대체됐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대로다.
일영에서 캠포리가 열리던 저녁, 형이 들렸다. 감방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기타를 건네주며 ‘노래해!’를 연신 외쳤지만, 민기 형은 딴청만 부렸다. 그때 옆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던 다른 학교 대원들이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형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눈물방울을 뚝뚝 떨궜다. 독일에서 <지하철 1호선>이 상영된 후 참석자들이 아카펠라로 아침이슬을 부르자 주저앉은 채 눈물 흘리던 그 모습이었다.
‘친구’의 기타 코드도 이때 배웠다. 동해시로 캠핑갔다가 바닷가에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단원을 기리며 부모에게 알리러 가는 기차 속에서 만든 곡이다. 부모는 갓 산 만돌린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린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매년 봄이면 형의 묘소로 하이킹을 하곤 했다.
우리는 민기 형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단조네, 저음이네, 운동권 가요네!’라는 비판도 있지만, ‘70년대 통기타 음악하고도 다르고, 80년대 노래운동 계열하고도 다른, 단독 카테고리’가 올바른 평가이다(한겨례, 2015.04.10.). 만족스러운 토종 문화를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 형의 노래로 음악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1집)
https://www.etnews.com/20240315000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