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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Jul 31. 2021

이것은 오직 ‘퀴어(queer)’에 대한 연극입니까?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 를 중심으로

이것은 오직 ‘퀴어(queer)’에 대한 연극입니까?: 눈멂 그리고 이홍도 작가의 파편과 메아리에 대하여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 를 중심으로-


필자: 조혜인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관극일시: 2021-07-01 (목) 오후 4시, 2021-07 (금) 오후 8시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서울변방연극제 블로그를 통해 원고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mtfestival/222447605972


짐 오베넌의 구역감 (C) 한민주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한 달 전에 같은 무대에 올라간 <이홍도 자서전(나의 극작 인생)>의 스핀오프(spin-off)로 전작과 같이 이홍도가 쓰고 송이원이 연출을 맡았다.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91년 초연된 토니 쿠시너(Tony Kushner)의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2032년에 무대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는 작가 이홍도가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연이다.[1] 신촌문화발전소 소극장에 입장하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권형준, 김정화, 박종현 배우가 저마다의 비즈니스(business)를 하고 있다. 무대 위에는 회색 플라스틱으로 된 세 개의 보면대가 놓여있으며, 의상 및 오브제들은 전체적으로 블랙-화이트의 모노 컬러 계열로 구성 되어있다. 상수에는 커다란 음식물 쓰레기통이 놓여 져 있고, 스크린에는 구획이 나누어 진 채 텍스트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스크린과 마찬가지로 흰 테이프로 구역이 마킹 되어 있다.


'눈멂'을 통해 파편적이고 메아리적인 움직임을 감각하기 (C) 조혜인


    필자는 본 공연에도 ‘비평가-화가(Critic-Artist)’ 되기 실험을 했음을 주지시킨다. 이러한 실험 중 본고의 사진 <’눈멂’을 통해 파편적이고 메아리적인 움직임을 감각하기>에서는 ‘배우들이 고정되어 있는 상태가 아님’을 포착했다. 동시다발적인 움직임 사이에서 배우들은 소리를 내기도 했으며, 그 소리를 다른 배우들이 메아리처럼 반복하곤 했다. 예를 들어, 권형준이 ‘음-’ 소리를 냈으면 김정화와 박종현이 차례로 ‘음-’, ‘음-’ 하는 식이었다. ‘비평가-화가’의 작업 과정에서 청각을 시각으로 표현해 내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가장 먼저 극장에서 감각되었던 ‘비 내리는 소리’를 시각으로 표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무대에서 현존(現存) 하지 않았던 비의 물성을 상상해 본 것이다. 또한 배우들의 움직임 사이에서 시각적 간극(gap)이 존재함으로써, 사진과 같은 순간의 포착이 아닌 ‘눈멂’을 경험하게 된다. 자크 데리다(Derrida)에 의하면 화가는 풍경을 대하던 정물을 대하던 응시와 동시에 ‘눈멂’을 경험한다. 요컨대, 화폭과 대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눈 중 어느 한쪽은 바라봄을 중지시켜야 한다. 화가는 대상이 이미 앞에 있음에도 부재를 경험하게 되며, 다른 한 쪽의 기억에 의존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2] 필자는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데리다의 사유는 눈의 권력 그리고 눈으로 인해 감상하는 예술품들로 이뤄진 박물관에서 눈멂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제시하기 위함이지만, 비평가-화가에게 봐야함(watching) 즉, 되도록이면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묘사해야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끔 한다. 드로잉을 함으로서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집착이 아닌 정서적으로 무대를 유랑하고 있는 비평가-화가는 무대가 지니는 찰나의 성질과 마주한 개별적 디테일들과 1:1로 몰두하게 된다. 무대에 대해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 비평가-화가의 의무가 아님을 다시한번 제고한다.”(조혜인, 4)[3]


    본 공연은 이처럼 필자에게 눈멂을 경험케 하며, 프리셋부터 배우가 주는 파편적 그리고 메아리적 움직임과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배우들이 입은 몸은 각자 ‘이홍도1, 이홍도2, 이홍도3’으로 상정되어 보이며,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반대자로 등장하기도 한다.[4] 그들의 발화 방식의 특징은 ‘나누어 말하기’ 또는 ‘뒤이어 반복하기’다. 이러한 발화의 특성을 가지며,「퀴어 작가를 위한 집중치료」를 읽는다. 마지막에는 “완치”라는 단어를 마치 구호처럼 셋이 밝게 외친다. 무대의 핵심 사건은 이홍도가 2032년에 퀴어(queer)에 대한 혐오적 시선이 담겨있는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전환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가정 하에, 이홍도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이 배우의 발화를 통해 시종일관 이루어진다.


표 1-1. 장면 구조 분석 (C) 조혜인
표 1-2. 장면 구조 분석 (C) 조혜인


    <표 1>을 통해 본 공연은 총 10개의 장면을 가짐을 알 수 있다. 특히 본 공연에서 이홍도가 퀴어 작가로서 사회와 연극계를 예리하게 꼬집는 부분은 장면 7, 장면 8, 장면 9, 장면 10에 두드러진다. ‘장면 7’에서는 기실 이홍도가 2020년 신춘문예에 희곡으로 등단했지만,[5] 펜데믹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신춘문예단막극전’이 취소되면서 등단 희곡작가의 소망이 ‘어쩔 수 없이’ 좌절된 바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이태원 게이 커뮤니티의 위기까지 사적인 문제에서 동시대 한국사회의 문제로까지 의식이 확장된다. ‘장면 8’에서는 그러한 그의 위태로운 내면과 사회에 대한 암담함이 표현된다. 옷걸이의 끝에 아슬아슬 걸린 채 쇠사슬에 묶여 있는 의자는 즉, 현 상황에서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는 벼랑 끝에 결박된 이홍도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가 있지 않는가? 나아가 ‘장면 9’ 에서는 이홍도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지적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관객들을 위한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호모섹슈얼리티 분석』을 한 문장씩 발화하며 책을 찢어 나간다. 의자 요컨대, ‘작가’는 그 광경을 무대 가운데의 책상 위에 앉아 가만히 지켜본다. 이홍도들은 찢겨진 종이를 분쇄기에 돌린다. 객석에서 실제 이홍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관객들은, 이홍도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고 있지 않을 까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박된 채 정면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작가는 과연 어떤 사유와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연습 스케치: 권형준과 이홍도 (C) 한민주>


  마지막으로, 장면 10은 본 공연의 하이라이트다. 실제 이홍도가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는 쇠사슬이 타이트하게 감긴 의자 위에 앉는다. 스크린에는 빼곡한 글자들로 채워진 커다란 말풍선이 나타난다. 그것은 전환 치료에 대한 텍스트이며, 이홍도는 그 텍스트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쥔 채 그것을 발화한다. 이홍도1, 이홍도2, 이홍도3이 다시 등장한다. 이홍도는 발화를 멈추고 육안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 내용이 세 명의 이홍도의 입을 통해 다시 발화된다. 이홍도가 읽고 있는 문장은 셋을 통해 파편적으로 발화되고, 겹쳐지며 오롯이 이홍도를 향해간다. 이홍도는 다시 목소리를 내어 발화한다. 그는 치료의 결과에 대해 말한다. “모든 것이 남의 일 같아지는 때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준비한 화이트보드에 은밀히 무언가를 적는다. 그리고 자신이 앉은 의자 위에 화이트보드를 올려놓는다. “나도 완전히 치료되었다.” 그는 잠시 시간차를 두더니, 또다시 다른 무언가를 적는다. “아마도.” 이홍도가 보드를 가만히 지켜보고 무대는 암전 된다.


스크린과 텍스트의 활용 (C) 한민주


    필자는 본 공연의 연출 적 장치들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긴 텍스트들의 전시’에 관한 것이다. 공연을 두 번 관람하면서, ‘왜 문서와 관련된 모든 텍스트들을 스크린에 나열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속 텍스트와 무대 위 배우를 바라보는 눈 사이에 ‘눈멂’이란 균열을 창출한다. 비장애인 관객은 이러한 ‘눈멂’이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뒤집어 사유해보자면, 퀴어 연극 및 소수자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메타연극(meta-theatre)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어쩌면, 이것이 하나의 베리어 프리(barrier-free)적 장치로서 활용 가능성으로 모색했음을 주지시킨다. 단순한 정보전달과 전시로의 텍스트 활용이 아닌, 파편화 된 구조를 통해 만화적 상상력과 결합하며 베리어 프리에 대한 고심을 이어 나간다. 또한 연극이라는 시간의 예술동안 작가가 설치해 놓은 글을 함께 읽어 나가며 작가의 내면에 가 닿아 보길 바라는 전략이 돋보인다.

    둘째로, 모노톤의 무대와 대비되는 ‘무지갯빛 조명’은 작가가 기분 좋은 순간에 반짝반짝 빛이 나게끔 하는 방식으로 사용된 점이다. 이것은 본 공연의 핵심적인 연출 포인트다. 무지개는 그 색이 가진 다채로움 만큼이나 퀴어의 정체성을 잘 설명해주는데, 시대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자 예술이 끊임없이 추락하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순간에 전복적 장치로서 활용됨을 주지시킨다.


<제유법 (Synecdoche)> (C) Byron Kim[6]


    이러한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자칫하면 단순히 ‘퀴어’의 이야기로만 국한되는 것 같아 보여도, 그 범위를 확장해서 사유해 볼 여지를 준다. 이는 미국의 화가 바이런 킴(Byron Kim)의 <제유법 Synecdoche>(1991-현재)의 창작 맥락에서도 발견된다. 바이런은 미국에서 유학 중 강도를 당해 재판에 선 경험이 있다. 그 당시 강도는 흑인이었고, 용의자 측 변호사는 어떤 피부색의 흑인이었는지 바이런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흑인의 피부 색에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냥 흑인’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적인 경험으로 인해 훗날 그의 무지를 스스로 반성하였고, 본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다. 그는 창작당시 지인을 만나 실제 피부색과 가깝게 색으로 재현했으며, 그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이다.


        “바이런 킴의 도전은 자신의 문화 정체성, 존재에 대한 탐구 속에서 더욱 확장된다. 바이런 킴이 1991년부터 그린 <제유법>은 그의 회화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 언뜻 보면 비슷한 색으로 구성된 모노크롬 회화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그냥 색이 아니다. 이 색들은 작가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작가가 재현해낸 그들의 피부색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다양한 인종과 섞여 미국에서 자란 작가의 다문화적인 정체성과 개인사가 작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 바이런 킴은 이 수백 개의 직사각형 판을 나란히 배치해 하나의 큰 사각형을 만든다. 판의 배열은 모델을 서준 사람들의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랐다고 한다. 더 밝은 피부색이 먼저 오지도 않고, 더 어두운 피부색이 나중에 오지도 않는다. (…)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구도적 구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중요하고 하나하나가 중심이 된다.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바이런 킴이 이 말을 제목으로 쓴 데에는, 피부색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모두 다른 피부색의 개인들이 각각 중심이 되어 한 사회를 구성한다는 관계적 차원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박보나, 22-26)[7]


    인종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하였으나 바이런 킴의 <제유법>과 이홍도의 <2032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소수자를 향한 관심을 공유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또한 둘은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는 점, ‘작가’(creator)라는 점, 그리고 세상을 살기 위해 ‘차이’들을 파편적으로 분화하며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여정(artistic journey)의 공통분모를 갖는다. 특히, 그들 모두가 “모든 것이 남의 일 같아지는 때인 것이다.” 라는 본 공연 속 대사와 같은 사유에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아주 큰 연결점이 존재한다. 모두가 다른 존재인만큼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 속에서 말이다.


        “모두가 너무나 다른 만큼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서로에 대해 대화와 경험이 부족할 때 이해의 과정은 더욱 험난해진다. 마치 내가 경험과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에 흑인의 피부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따라서 우리는 같이 살기 위해서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 더 요란하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박보나, 27)[8]


    바이런의 흑인에 대한 경험처럼 잊혀진 타자와 세계가 반영된 무채색 무대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깨달음 뒤 정확한 컬러를 상정하기 힘들만큼 피부에는 다양한 색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바이런의 작품 <제유법>과 같이 그 다양성이라는 감각이 공유되는 순간 무지갯빛으로 물드는 <2023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바라본다. 무지와 각성, 차별과 소외의 파편들이 각자만의 메아리가 되어 서로 다른 예술형식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본 공연은 타자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관객에게 하나의 경험이 되어주며, 다양성에 대해 자문자답 할 수 있는 메아리가 되어준다. 마치 이홍도들의 자문자답의 메아리처럼 말이다. 요컨대,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연이지만, 그 대상은 인종 등 다양한 이슈로 확장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경험치가 부족한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퀴어에 대한’(about queer) 연극을 시도하는 이홍도는 ‘퀴어 만을’(only for queer)위한 연극을 하는 예술가가 아니다. <제유법>에 대한 박보나의 사유처럼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가 메아리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요란한 경험으로써 이홍도의 연극이 기능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2032년에도 이홍도와 丙소사이어티가 그 중심과 변방을 오고 가는 창작자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하며 본고를 마무리한다. 


미주

[1] 리뷰가 영이는 본 공연을 ‘구역감’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해가며 리뷰 내용을 풀어낸 바 있다. 영이, <(퀴어) 작가의 사라지지 않는 빈자리>, 연극 in 리뷰 제2014호, 2021-07-15,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2462

(퀴어) 작가의 사라지지 않는 빈자리

[2] Derrida, Jacques,『눈먼 자의 기억: 자화상과 다른 잔해들』,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예술학협동과정 예술미학 강의노트 (교수자: 황선영), 조혜인 정리, 2021-05-18

[3] 조혜인, <변방적 비평문 쓰기의 과정 실험: ‘비평가-화가(Critic-Artist)’ 되기>, 서울변방연극제 블로그, 2021-07-27,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mtfestival&logNo=222447655157&navType=tl

[4] 본 공연과 협력한 극단 丙 소사이어티는 2019년 제19회 서울변방연극제에서 <신토불이 진품명품>을 통해 ‘배우가 작가의 몸’을 입는 방식을 실험한 바 있다. “퀴어(queer)의 어원이 ‘횡단하다’에서 온 지점을 사유 해 볼 때, 이민자로서 한국인의 주류 사회 바깥에 소속된 ‘송이원’, 젠더의 스펙트럼 위에서 불안정성을 겪는 ‘허지우’, 국가의 법에 대하여 탈경계를 시도하는 ‘오수환’의 자기 이야기는 극중 비규범적 몸, 즉 비체(abjection)를 창출하며 퀴어성(queerness)을 향유한다. 본 기고문은 이러한 세 작가의 몸을 입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송이원, 허지우, 오수환’을 통해 시도된 ‘퀴어적 전환(queer turn)’에 대해 전개 해 나갈 것이다.” 조혜인, <국가와 사회에 대항하는 자기 이야기를 통한 ‘‘퀴어적 전환’ 을 시도하기> 丙 소사이어티 의 <신토불이 진품명품>@미아리고개예술극장,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9-08-06, https://indienbob.tistory.com/1140

[5] 그는 <컬럼비아대 기숙사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동양인 임산부와 현장에서 도주한 동양인 남성에 대한 뉴욕타임즈의 지나치게 짧은 보도기사>로 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되었다. 심사평으로는 “이 작품은 작가가 창조해낸 가공의 세계와 작가 자신의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동시대 창작자로서의 자기참조뿐 아니라 희곡과 연극, 예술과 문화권력, 심지어 신춘문예에 대한 참조까지 작품 안에 녹여내는 과감한 메타연극의 설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창작자로서의 막막함과 혼란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여러 층위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구조와 구성의 경쾌함으로 연극의 유희적 균형을 맞추는 영리함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대 연극의 형식적 진화를 희곡의 영역으로 구현해냈다는데 큰 미덕이 있었으며, 문학적인 면으로도 희곡의 다양한 형식적 진화에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문삼화, 박해성) 서재훈, <다양해지는 창작 시선…영리한 변주 눈에 띄어>, 한국일보, 2020-01-0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2241400048575

[6] 바이런 킴(Byron Kim), <제유법 (Synecdoche)>, 1991-현재, 나무에 유화 및 왁스, 각 25.4Ⅹ20.3cm, 미국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소장.

[7] 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 (When Attitudes Become Artwork』, ㈜바다출판사, 2019, 22-26쪽.

[8] 위의 책,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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