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깊이가 같지 않을 때. feat 영화 <연지구> 후기
장국영 23주기. 관금붕 감독의 <연지구>가 다시 극장에 걸렸습니다. 초등학생 무렵, 장국영의 미모에 넋을 잃고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고, 사랑의 무게를 이해하기엔 세상이 그저 투명했었죠
이번에 감독판으로 재개봉한다기에 놓치지 않고 보려 했는데, 아뿔싸. 우리 동네 극장에서는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오전에만 상영하지 뭐예요.
그렇다고 그가 떠난 오늘을 놓치기도 싫었던 저는, 방구석 1열을 택했습니다.
<연지구(胭脂扣)>는 관금붕 감독의 1988년 작품으로 장국영과 매염방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연지구’라고 하면 뭔가 지구와 관련이 있는 영화인가 오해하실 수도 있겠네요. 어린 시절 제가 그랬거든요. 이 영화의 ‘연지’는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으로 연지구는 ‘연지함’을 의미한답니다.
*스포주의
때는 1930년대 혼란의 홍콩. 인기 있는 기생 여화(매염방 분)는 부잣집 도련님 진진방(장국영)과 한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어떻게 장국영의 눈빛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맑은 눈빛에 누구를 쳐다보던 일생의 사랑처럼 깊은 정이 넘치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걸요.
어떻게 매염방의 공허하면서도 사연 있는 눈빛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난처럼 외롭지만 고고한 기백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쏠리는 걸요.
영화는 시공을 넘나들어 다시 1980년대 홍콩. 진방을 기다리며 구천을 떠돌던 여화는 신문사 기자 아정을 찾아 사람을 찾는 광고를 내달라고 합니다. 그와 그녀가 죽었던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기다린다고요.
기생과 도련님의 사랑이란 주제부터 슬픈 결말이 정해져 있는 법. 두 사람은 가족의 반대에 동반자살을 선택했던 거예요. 저승의 여화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방을 기다리다 그를 찾으러 직접 이승으로 오게 된 것이랍니다.
진방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여화를 찾아 이승을 맴돌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 1930년대.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친 진방은 여화를 위해 집을 나옵니다. 부잣집 도련님에서 기생 부인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처지로 전락한 진방. 그 무력한 모습에서 이상의 <날개> 속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겹쳐 보였습니다. 사랑을 위해 집을 나왔지만, 결국 사랑에 기생하며 쓸모를 잃어가는 한 남자의 초상이었죠.
진방도 물론 노력했습니다. 경극단에 들어가서 온갖 잡일을 하고 처음 받은 돈으로 여화에게 연지가 담긴 작은 목걸이를 선물합니다. 네. 바로 영화의 제목이에요.
그렇지만, 부잣집 도련님이 그런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었겠어요. 두 사람은 결국 동반자살을 선택한 게지요.
약속의 날. 여화는 변해버린 홍콩의 거리에서 애처롭게 그렇지만 강한 믿음으로 그를 기다립니다. 진방은, 오지 않아요.
아정과 그의 여자친구는 여화를 위해 진방의 소식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옛날 신문에서 찾아낸 충격적인 사실. 진방은 그날 죽지 않았던 거예요. 그리고 여화는 진방이 죽지 않을까 두려워 독약 외에도 그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시켰죠. 이것은 사랑일까요, 집착일까요.
아정은 결국 진방을 찾아냅니다. 전 재산을 잃고 가족에게도 버림받아 예전에는 자신이 잘 나갔었다고 떠벌리며 영화 세트장의 초라한 엑스트라로 살아가고 있었죠.
50년을 한결같이 기다린 여화의 '정'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일편단심이었지만, 살아서 늙어버린 진방의 '정'은 구질구질하고 비겁한 생존이었습니다. 그 어긋난 사랑의 깊이가 마주하는 순간, 여화는 그에게 연지구를 돌려주고 홀연히 떠납니다. 비로소 미련이라는 이름의 빚을 청산하듯이요
사랑은 불나방 같이 활활 타오르는 건가요. 두 사람은 분명 사랑했는데 그 깊이가 달라서였을까요, 그 방법이 달라서였을까요. 결혼한 사람들은 웃으며 말합니다. 사랑은 3년? 이후는 동지애라고.
여화와 진방은 그 활활 타오르는 격정의 시기를 넘기지 못한 건가요?
진방도 분명 여화를 사랑했겠지요. 그러니 여화가 손을 잡고 데려다준 경극단 근처를 배회하고, 나이 든 후에는 엑스트라의 모습으로나마 그 근처에 맴돌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같이 죽을 수는 없었지만 그 또한 그의 정이 아니었을까요.
사랑하지 않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깊이가 다른 것이 애달픕니다.
시간은 지나 지금은 2026년. 장국영도 매염방도 이제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홍콩도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화를, 그들의 노래를 듣는 사람만 나이 들어가며 영화와 노래를 곱씹어봅니다.
정이란 불같이 뜨거운데 어찌 일생을 태워 이어나가는 것은 어려울까요
부디 그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천 갈래 그리움을 다 털어놓고 당신이 나를 저버리지 않기를...
誓言幻作烟云字 사랑의 맹세는 구름과 환상처럼 사라지고
费尽千般心思 마음만 천 갈래 애가 닳았군요
情像火灼般热 정이란 불같이 뜨거운데
怎烧一生一世 어찌 일생을 태워
延续不容易 이어가는 것이 어려울까요
负情是你的名字 정을 저버린 이는 당신
错付千般相思 천 갈래 그리움을 헛되이 쏟아부었네요
情像水向东逝去 정은 물과 같아 동쪽으로 천천히 흘러가버리고
痴心枉倾注 일편단심은 허무하게 무너졌어요
愿那天未曾遇 그날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只盼相依 그저 서로 의지하기를 바랐을 뿐인데
那管见尽遗憾世事 세상 속상한 일이 될 줄이야
渐老芳华 꽃 같던 시절은 점점 저물어가고
爱火未减人面变异 사랑은 불꽃은 줄지 않았건만 사람의 얼굴은 변했네요
祈求在那天重遇 부디 그날 다시 만나기를 기도해요
诉尽千般相思 천 갈래 그리움을 다 털어놓을 수 있게
祈望不再辜负我 다시는 나를 저버리지 않기를 기대해요
痴心的关注 어리석은 돌봄과 관심
人被爱留住 그대가 사랑에 붙잡혀 남을 수 있게
祈望不再辜负我 다시는 나를 저버리지 않기를 기대해요
痴心的关注 어리석은 돌봄과 관심
问哪天会重遇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