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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진 Dec 29. 2023

늘 써내려가는 심리검사지의 이름을 아나요

문장완성검사, 우울척도검사, tci검사





길어지는 우울증 속에서 또 번아웃이 왔다.

지지난 주부터 학교상담센터를 통해 상담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내 상담(내담) 이력은 꽤 화려한 편이다.

중고등학교 위클래스 상담실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자퇴 이후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진행한 청소년동반자 장기상담, 

대학교 들어와서는 학생상담센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의사의 진료를 받으며 짧게나마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상담은 언제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털어놓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초중학교 시절 또래상담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상담에 대한 진입장벽도 낮아진 것이리라.

단순하게는 학업 스트레스부터 깊이 파고든 내 가정사와 내면 속 이야기까지.



어릴 때는 굵고 짧은 고민들이 이어졌던 반면, 상담을 오래 지속한 지금은 무엇이 문제인지는 안다.

그런데 문제라는 것은 오직 '나'로 인해 형성된 것이 아니며, 

유년기부터 지속해 만들어진 잘못된 신념이나 성격 따위는 한번에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또 상담을 신청했다. 이번이 마지막 학기니까 대학교에서 받는 마지막 상담일 것이다.

상담할 때마다 새로운 상담자 선생님을 만나고, 나는 매번 했던 심리검사와 상담을 이어간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심리검사지를 형식적이고 일관적으로 작성한다.

솔직하지만 신속하게, 반복되는 문항이 있더라도 다르지 않게.






문장완성검사는 심리, 우울 검사를 받아본 사람들이라면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가족에 대한 태도부터 사회에 대한 태도,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문장으로 간결하게 적는 것.

정신의학과에 갔을 때도, 상담센터에 갔을 때도 항상 작성해 익숙하다 못해 문장이 기억날 정도다.

상담자들과 의사에게 나는 처음 보는 내담자이자 환자이니 당연하지만,

나는 나를 너무 오랫동안 봐왔기에 이젠 무슨 답을 내놓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나친 자기이해는 긍정에 가까울까, 부정에 가까울까?


이미 직시하고 있는(어쩌면 직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감정과 겪었던 사건에 대해 줄줄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광경을 보면 그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느껴진다.


'나는 이랬어', '아마 이런 감정이었을 거야' 라는 식으로 통일하여 바라보고 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은 과거가 되기에 흐려진 걸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또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다 보면 당시의 아픔 역시 무뎌지기 때문이다.

정말 무뎌지는 건지, 다른 것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뇌 속의 공간을 비우기 위함인지.

내가 나약해질 때마다 불쑥 찾아오는 걸 보면 바이러스처럼 숨 죽여 존재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심리검사지를 썼다.

최근 마음이 불안정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해 일상 생활을 하기 힘들었습니까, 아니오.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잘 살 것이다, 대체로 그렇다.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_______ 내가 노력한 일들에서 실패를 겪는 것이다.



그런 종이들을 몇 장 쓰고 넘기고, 결과지를 보고 해석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다.

내가 알고 있고, 알고 있는데 평소 자각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던 일면을 살핀다.

어, 그렇군요. 와, 그런가요. 네, 맞아요. 중간중간 맞장구도 쳐주고.



주관적으로 약간의 우울 증세를 느끼고 있지만, 그 정도가 심각하지는 않다.

나는 결과지를 받아든 채 다음 상담일자를 잡는다.

8회기, 약 두 달 동안 이어질 상담의 목표로 '번아웃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매번 쉼 없이 달려오는 내가 항상 마주하는 문제의 시기를 헤쳐나가야 할 때가 왔다.


괜찮아졌다가, 또 나빠졌다가, 우울해졌다가, 어느 날에는 미친듯이 에너지가 상승하는 곡선을 타고 오르내리며 침잠하는 날들에 관하여.



나의 생각과 감상을 기록하고자 다가오는 주 마다 한 번씩 적어본다.

어느 누군가에게 해결책도 줄 수 없고 감상과 이해를 주기에도 불친절한 일기로서.

연말이 주는 탈력감을 삼켜낸 채 타자를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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