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비어의 꿀

by 한 나강

샐비어의 꿀에선 단맛이 났다. 수줍게 달아오른 작고 길쭉길쭉한 꽃을 한 송이씩 따 쪽쪽 빨아먹었다. 꿀을 빼앗긴 꽃은 납작하게 시들었고, 잿빛에 젖어있던 마음은 한순간 촘촘히 붉게 물들었다. 해가 지고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듯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사라진 폐허에 싱그러운 꽃송이들이 꿀물을 똑똑 흘렸다. 여태 그 단맛을 나는 잊지 못한다.


사십이 넘어 황량했던 어린 시절을 돌이키는 건 그리 마뜩잖다. 다 크다 못해 애 엄마가 되어서도 그 시절 그토록 외로웠다고 우는 소릴 해대는 게 어쩐지 볼품없어 보였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그날들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어느 누구에게 속 시원히 털어놔본 적도 별로 없지만, 사람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혼자서도 늘 생각을 조심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생애 한때를 슬픔과 공허로만 채색하는 습관을 버리려 했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좋았던 기억이 드문 것이 별난 성격 탓이거나 좋지 않은 병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뭄이라도 든 것처럼 물기 하나 없는 그때는 매번 마르지도 않은 목을 축이게 만들었다. 마시고 마셔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래도록 갈라진 마음엔 나조차도 온전히 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가 얼마큼 부족한 것인지 매번 고꾸라질 때마다 자문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너무도 확신했던 탓에 남들 앞에서 늘 스스로를 구부정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리 그려둔 자화상을 넘어설 수가 없었고, 네임펜으로 그어 놓은 그림처럼 더는 수정할 수도 덧칠할 수도 없는 경계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을 무섭게 심판했다. 부모마저 떠났다면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아 마땅하다. 꼭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숙명이라도 지닌 것인지 누군가가 마음을 주면 차차 그자가 날 떨쳐낼 만한 이유들을 떠올렸다. 마침내 등을 돌려야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 뒤론 어이없게도 또다시 설움에 북받쳤다. 이런 식으로 하나 둘 내가 사랑받기엔 모자란 인간이란 증거들을 속속들이 채취했다. 그래야만 세상 모든 것들이 이치에 맞게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고작 백 미터 거리에 있는 그곳으로 향하곤 했다. 차라리 닿을 수 없게끔 멀었다면 찾지 않았을 텐데, 울타리를 따라 피어있는 샛노란 개나리들을 세다 보면 어느덧 발끝이 거기 닿아 있었다. 초록색 철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1동의 5층집. 조금의 서운한 기색도 없이 반듯하게 선 옛집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나를 잘 알았던 경비 아저씨는 까치발을 든 마음을 알아주었을까. 누구라도 그 속을 물끄러미 바라봐주었다면 조금은 덜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까짓 거 별 거 아니라는 듯 나도 발을 옮겼다. 흙냄새와 쇠냄새가 뒤섞인 놀이터를 빙빙 돌다 단지 한가운데 커다란 바윗돌을 둘러 만들어 놓은 화단으로 향했다. 정중앙에 사철나무가 우뚝 솟아있었고 주위로는 분홍의 꽃잔디와 다홍의 샐비어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피어있었다. 새까만 개미들이 먹이를 찾아 줄지어 서두르자, 일곱 살의 까만 두 눈도 새삼 바빠졌다. 톡톡 소리를 내며 떼어지는 꽃을 입에다 물고선 쑥 잡아당겨 꿀을 취했다. 따고 취하고, 따고 취하고, 계속해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멈출 수가 없이 달고 또 달았다. 허리를 구부리고 샐비어 길을 빙 둘러 따르다 아직도 먹을 게 남았단 생각에 안도하곤 했다.

요즘은 샐비어를 보기가 힘들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뼈 아래가 물컹거리는데도 한 번쯤 마주치길 바라왔다. 어찌 보면 사람은 아픔을 피하기보단 즐기는 것도 같다. 가끔은 와르르 무너지기를 자처해 비록 잔허일지언정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딛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까도 싶다. 나의 전부였던 세상이 사라져 버린 그때로 돌아간다면 없어지고 없어져 마지막엔 나조차도 찾을 수 없었던 그 텅 빈 땅이 될 수 있다.

비어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차라리 달다. 쓰디쓴 현실이 있기에 샐비어의 꿀맛이 더 달콤했던 것처럼 기댈 곳 없어 날아드는 바람 한 점에도 억새와 같이 마음이 휜다. 휘는 것이 어때서. 그 덕에 무심히 다가오는 세상을 더 간절하게 느낀다. 속이야 어떻든 보는 이들은 아름답다고 할 풍경 속에 내가 남아있다.

멀리서도 알아볼 저 작은 꽃잎들이 옹기종기 모여선 머리를 흔들었다. 쿵 떨어졌던 가슴이 선 땅을 붉게 물들였다. 저들처럼 쨍하니 보기만 해도 예쁘도록. 가지런히 두 손 모은 잎들이 날 더러 자기를 꺾으라고 말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더는 너를 맛보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정말 그럴까.


다 자라 버린 나는 그때의 아이를 여태 가엾이 여긴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언제인가 그랬을 땐 창피해했지만, 살다가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기를 택하기로 한다. 알고 보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니까. 저마다 마음 귀퉁이에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처연한 존재를 하나쯤은 숨기고들 산다. 부디 아닌 척은 말자. 옆통수에 흰머리가 자라나고 펴지지 않는 주름이 늘어난다 해서 영원한 어른인 것은 아니다. 그간 먹은 나이가 무색하도록 작디작은 아이가 틈만 나면 화단 옆을 기웃거린다. 최선을 다했어도 최악의 날이라서, 사랑받고 싶었는데 되레 미움 받아서, 이해를 원했지만 오해만 얻어서, 그냥 외로웠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홀로 두어서. 그래서 또 그래서 한사코 샐비어를 따먹으려 그 고개 들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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