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인간

by 한 나강

아무런 계획 없이 부산역으로 향했다. 81번 버스를 타고 국제시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보수동 책방 골목이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았는데도 그곳은 예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긴 역사만큼이나 굴곡 있는 언덕을 따라 걷다 보면 책방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늘어 있었다. 대부분 아가리를 벌린 듯 뻥 뚫린 구조로 되어 있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다. 꼼꼼하게 정리되지 않은 무질서함이 매력적인 데다 바닥이고 책장이고 빈틈없이 꽉 메워진 매장 안을 보노라면 사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바깥으로 밀려 나와 가로눕혀진 책들은 소리 없이 적요에 싸여있었고, 드문드문 호객을 하는 책방 주인들의 부름이 그 침묵을 기분 좋게 깨곤 했다.


잡다한 상념에 젖어 거리를 서성거리다 올 때마다 들르는 한 책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잦아드는 출입문 종소리를 들으며 꽤나 복작거리는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마치 영화에서의 타임랩스 기법까. 몇 해 전 겨울의 그날이 불과 몇 초 전처럼 느껴졌다. 짙은 다갈색의 책장에선 그때 맡았던 오래된 책들과 나무 향이 뒤섞여 배어 나왔고, 은발의 주인장은 아무 색깔도 냄새도 없는 허연 도시락을 꺼내 한 술씩 뜨는 중이었다. 그 고요한 달그락거림에 꺼냈던 책을 툭툭 집어넣는 소리,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이들의 소리가 더해져 서가를 거니는 걸음마저 나른하게 했다. 저절로 느려진 호흡을 따라 꺼내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꽂혀있거나 바닥으로부터 위태롭게 쌓여있는 책들을 훑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먼 길을 달려 여기에만 오면, 잔잔한 호숫가를 거니는 유유한 산책자가 될 수 있었다. 주변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덩치를 불려가는 동안에도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온 책방들이었다.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멋들어진 나이테를 따라 걸으며, 서가의 책들을 두서없이 손으로 쓸었다. 수많은 날들을 내게만 몰두하던 시선이 끝없이 늘어선 책들에 머물며 잠시 쉬어간다.

하릴없이 버정거리기만 하다 까치발로 집어낸 책이었다. 리그닌 제거를 덜 한 고서답게 적어도 광복은 겪었음직한 외관을 자랑했다. 옆면은 싯누렇게 바랬고, 표지나 속지나 하나같이 축축하고 구불구불한 세월을 머금고 있었다. 새하얀 표백지로 만든 책들에 둘러싸여 그 칙칙함이 더 강조되는 듯했는데, 옛날부터 살 것도 아니면서 괜히 한 번쯤 꺼내보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어떤 책들은 오래된 주제에 빳빳한 비닐까지 입고는 십만 원 이상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얼마나 누리끼리하고 쭈글쭈글한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그 긴 시간 버려지거나 잊히지 않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버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이 온다. 그럼에도 살 생각은 없으니 내려놓기로 하고.

한참 만에 진짜로 고른 책은 2009년생이었다. 초판 2쇄. 서서 읽다 보니 내용이 마음에 들어, 이대로 사갈지 아니면 같은 것으로 새 책을 장만할지를 고민했다. 가끔은 새것만이 가지는 도도한 뻣뻣함이 좋기도 했으니까. 평생 구겨지지 않을 것처럼 찰싹 맞닿아 있는 책장이나 하드커버를 처음 열어젖힐 때 느껴지는 팽팽한 당김, 선명하게 찍힌 글자들에서 나는 잉크냄새, 수없이 베어봤던 날카로운 종이 끝까지, 순간 오감을 이용해 새 책의 전신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다시 2009년생의 헌책을 보았다. 가격에 영 하나가 더 붙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윗면엔 쉽게 닦아내기 힘든 새까만 먼지들이 앉아있었고, 살짝 구겨진 표지에선 출처를 알 수 없는 약간의 끈끈함이 묻어 나왔다. 십육 년이란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채 위아래가 전체적으로 뒤틀려있기도 했다. 선뜻 값을 치르기엔 영 꺼림칙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어쩐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었다. 이 처연한 몰골을 보며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되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이런 사람이길 바랐다. 나이를 먹어 겉모습이 전보다 볼품없어지더라도 버려지거나 잊히지 않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 남들이 보기에 그 사는 모습이 좀 따분하더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소명을 다 해내고야 마는 사람. 그러는 사이 아무리 닦아도 지울 수 없는 이물이 남고 뒤틀린 과거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하더라도 주어진 날들 속에 담담히 우러나 제 몫을 하는 사람.

어느새 사십여 년의 생을 품게 된 헌 인간은 다소 꿉꿉한 헌책을 쥐고서 책방을 걸어 나왔다. 문 앞에 선 채로 젖었다 마른 낙엽처럼 더는 가볍지만은 않은 책장을 넘겨 보았다. 앞뒤로 까맣게 찍혀있는 글자들이 그날의 바람이나 햇살이나 사람들의 발소리 등과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다가왔다. 한 번씩 나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이도저도 아닌 흐릿한 인상만이 남는 것과는 확연히 대비되었다. 단지 느낄 수 없을 뿐 나의 삶도 이처럼 빼곡히 기록되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 책의 다음 장엔 호기심이 일지 않는 건지 몰랐다. 아직 다 끝나진 않았단 생각에 앞으로 담아갈 것들을 꿈꾸는 그런 대책 없는 마음이 사라졌다. 언제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르게 접어 놓은 흔적 조차 없이.

흔들리는 마음 피에 끼워두었다. 책을 덮으며 이 헌 인간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닿기를 염원했다. 온 힘을 다해 이 자리에 있어 볼 테니, 부디 나를 모른 척 지나치지 말기를. 비록 전해줄 이야기가 그리 대단치는 않겠지만,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써왔음은 분명한 어느 작자의 역사를 알아봐 주기를. 한참이 흐른 뒤 사람들이 나의 골목에 드나들 땐 내가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보수동 책방골목에 안녕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