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의미와 속박
이전, TV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를 시청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다. ‘애니메이션은 결국에는 애니메이션으로 남아야 한다.’ 이에 따라, 나는 TV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를 비판하였다. 그것은 흥행을 위하여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를 실종시킨 채 원작의 임팩트 컷을 복사했을 뿐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안녕, 에리>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안녕, 에리>는 만화이다. 그러나, 후지모토 타츠키는 영화라는 자신의 취향을 과잉하게 발산한 끝에 만화로 남아야 할 작품을 영화에 속박시켜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안녕, 에리>를 호평할 수 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도는 언제나 환영이지만, 동시에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끝내 만화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은 작품마저 나의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영화의 의미
그럼에도, 나는 <안녕, 에리>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먼저 남겨보고자 한다. 주제에 대한 견해 제시 없이 진행되는 비판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녕, 에리>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영화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현실 파트와 영화 파트가 번갈아 진행되면서 독자에게 의문을 남기는 수법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마저 전부 영화라고 생각하면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이를 통해 영화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 영화의 의미란 바로 ‘삶과 기억’이다. 주인공 유타는 삶을 촬영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이어붙여 영화로 만들어내고, 끝내 그 의도대로 삶의 주인공을 기억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의미이다. 영화란 카메라로서 삶을 뇌리에 남기는 예술이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두 편의 극중극과 이를 구성하는 삶을 하나의 영화로 엮어내어 그 사실을 표현한다.
1부, 유타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미지를 가족보다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영화는 의도의 예술이기도 하다. 유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아름답게 기억하고자 하였다면, 그의 영화를 감상하게 되는 사람들도 그녀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유타의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떠나간 사람이다. 따라서,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별 역시 존재해야 하는 법이다. 이에 유타는 일종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판타지 한 꼬집’을 추가한다. 유타는 폭발로서 어머니와 이별하는 것으로 그녀를 아름답게 기억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미숙한 행위였다. 유타는 어머니의 임종의 순간을 회피했다. 그렇기에 그는 어머니를 자신의 의도대로 기억할 수 없다.
아무리 어머니가 유타를 학대했더라도, 유타의 의도대로 완성된 영화는 어머니를 끝내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유타는 어머니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명암이 혼재된 삶을 기반으로 품고 아름다움을 기억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유타는 도망치며 모든 것을 떠뜨려버렸다. 삶의 끝과 마주하지 못한 채 찾아오는 이별은, 아름다운 기억 속에 침투하여 방해 공작을 저지르게 될 뿐이다. 에리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2부는 이를 해소한다.
유타는 아무도 자신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자 죽음을 결심한다. 그 결심이 전부 카메라에 촬영된다는 것이 후술할 포인트다. 그렇게 올라간 병원 옥상에서 만난 소녀 에리의 손에 이끌린 유타의 모습으로 2부는 시작된다. 유타는 에리와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자신의 작품을 이해받으며 함께 영화를 제작하고자 한다. 그렇게 유타는 삶의 이유를 되찾고, 그 역시 카메라의 촬영되어 삶의 일부분, 영화의 일부분으로 남는다. 그렇게 삶과 영화는 동치된다. 유타가 제작하는 영화의 줄거리가, 영화 밖 유타의 삶과 동일해진다. 시나리오 속의 흡혈귀의 죽음과, 현실의 에리의 죽음이 동일해진다. 결국, 어느 쪽이 시나리오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우리는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이 탄생한다. 그 안에서 유타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끝내 용기를 내어 이전의 자신과는 달리 에리의 임종을 제대로 목격하게 된다. 이제 유타는 그녀를 아름답게 기억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는 오산이었다. 그후 오랜 시간 동안 유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에리의 영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무언가 부족하다. 영화는 삶을 대변하고 기억하도록 한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때때로 기억하는 아름다운 삶, 그것이 바로 영화의 수많은 의미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유타는 무언가를 빠뜨렸다. 이별. 여기서 누군가는 질문할 것이다. ‘에리의 죽음을 목격하고 촬영하는 것으로 유타는 그녀와 이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1부를 기억해야 한다. 유타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과 마주하지 않은 채 ‘폭발’로서 이별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전자가 충족된 2부의 엔딩은 이제 후자를 충족해야 한다. 죽음과 마주하는 엔딩은 현실의 것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공상 예술의 엔딩에는 판타지가 한 꼬집 정도는 추가되어도 좋은 법이며, 그렇기에 유타는 1부의 엔딩을 영화로서 폭발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2부 역시 그리해야만 수미상관을 통해 완벽해질 것이다.
에리의 죽음까지는 그저 유타가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이 촬영되어 아름답게 나열되어 있었을 뿐, 영화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이를 깨달은 유타는 순간의 나열에 종지부를 찍고자 추억의 장소, 영화 감상실을 폭파한다. 그래도 괜찮다. 추억의 장소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모든 것을 기억하여 아름답게 전해줄 테니까. 그렇기에 영화는 삶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잊으며 흘려보낸 삶이라도, 영화는 끝내 떠올리도록 만들어준다. <안녕, 에리>는 그러한 영화 예술의 의미를 ‘영화처럼‘ 표현해낸다. 그 증거로, 이 작품은 시네마스코프 등의 화면 비율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이야기의 전체를 하나의 영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속박
하지만, 그것은 만화 예술에 있어서는 독소가 된다. 나는 만화를 칸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대로 종이에 다양한 칸을 분배하고, 그림을 그려넣어 연출되는 예술, 그것이 바로 만화이다. <안녕, 에리>는 이에 반하는 대표적인 예시 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안녕, 에리>의 컷은 단순하다. 모든 장면이 시네마스코프나 4:3 비율의 칸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와 주제라는 특징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연출이겠으나, 나는 그러한 연출이 오히려 이 작품의 정체성을 확정짓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좋은 만화란 만화만의 특징으로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확실히 전달해내는 작품일 것이다. <안녕, 에리>는 그렇지 않다. 영화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구미가 당길만한 주제를 매력적인 이야기로 전달하고는 있지만, 변화 없이 평이한, 영화의 화면 비율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칸의 나열은 결국 <안녕, 에리>라는 작품을 좋은 ‘만화’로는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영화의 모방이자, 더 나아가 속박일 뿐이다.
만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영화와도 같은 만화가 그려져야 한다는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다. 아무리 영화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만화의 특성을 전부 제거하고 영화의 가면만을 씌워두는 것은 결국 만화와 영화 둘 중 어느 쪽의 모습도 가지지 못하도록 한다. 영화도, 만화도 되지 못한 작품에는 공허한 이야기, 혹은 작가의 욕심만이 남는다. 영화라는 예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보고자 하는 욕심, 그 만족을 위해 후지모토 타츠키는 <안녕, 에리>를 그려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강하게 이야기하겠다. 만화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려낸 결과물은, 만화는 커녕 주제를 담아낼 그릇조차 될 수 없다.
<안녕, 에리>를 읽으며 줄곧 생각했다. 사랑의 존재는 때때로 그 표현의 수단을 철저히 속박해버리는지도 모른다고. <안녕, 에리>의 주제와 이야기 속에서 나는 영화에 대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 작품을 만화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영화가 되고 싶었던 만화는, 정작 만화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