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HTE STATT ROSEN", 장미 대신 권리를
국제 여성의 날이 휴일인 베를린. Leopoldplatz에서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거리를 행진하며 숨을 크게 쉬었다. 자유라는 감각을 느꼈다. 베를린에 도착한 지 사흘째, 조금은 겁에 질려 굳어있던 마음이 녹았다. 이번엔 괜찮을 거야, 확신이 생겼다.
베를린은 2019년에 국제 여성의 날을 독일 주 중 최초로 공휴일로 선포했다. 전날인 3월 7일 진행됐던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학교 직원 분이 이를 설명하면서 미리 여성의 날을 축하하기도 했다. 여성의 날이 공휴일이고 학교에서도 여성의 날을 당연히 축하하고 기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신기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이어진 캠퍼스 투어에서 내일 여성의 날 데모를 함께 갈 사람이 없냐고 묻는 프랑스 친구 Lucile을 만났다. 한국에서 만났던 독일 친구 Lenke가 미리 초대해 준 베를린 페미니스트 왓츠앱 그룹을 통해 시위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었는데, 막 독일에 도착해서 혼자 시위에 갈 용기는 없었던 참이었다. 반가움을 있는 대로 다 표현하며 함께 하자고 했고, 그 자리에서 당장 내일의 시위를 위한 그룹이 만들어졌다. 크로아티아, 핀란드에서 온 친구들이 함께 했고, 이를 기숙사 플랫메이트들에게 얘기해서 인도, 일본의 친구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여성의 날 시위'에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생겨나는 유대감이 있었다.
기다리던 3월 8일 당일이 되었다. 친구들과는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Leopoldplatz로 향했다. 여성의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이상으로 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건 나에게도 처음이라 조금은 떨렸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퀴어 퍼레이드와 시위에 참여하며, 행사로 향해 가는 길은 항상 긴장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설렘을 가져다준다는 걸 배웠다. 행사가 열리는 역에 가까워지면 열차 안이 피켓을 들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로 하나둘씩 채워진다. 출발할 때는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더라도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더 나은 삶을 요구하는 사람이, 더 많은 존재의 권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완전한 타인이고, 교류 없이 그냥 지나칠 것이다. 어쩌면 길에서 잠시 스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되고 그 용기는 일상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WE BREAK YOUR BORDERS, WE SMASH YOUR FASCISM
현장에 도착해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이 나눠준 인종차별, 트랜스 혐오, 퀴어혐오와 성차별에 대항한다는 성명문을 받아 들었다. 다양한 피부색과 다양한 형태의 여성들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 거대한 Vagina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을 구경했고,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듣고, 알아볼 수 있는 피켓들을 읽었다.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기록했다. 친구들과 거리를 걸으며 각국의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한국의 상황을 말해주면서 슬퍼졌지만 그래도 분명히 점점 나아지고 있다, 내가 그 여정에 함께 할 거다 힘주어 이야기했다.
베를린 경제 법학 대학에 2020년과 2022년 봄에 교환학생으로 파견됐고, 2020년은 파견을 취소하고 돌아왔다. 유럽에서 코로나가 심각해지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하게 되며 처음 도착한 일주일과 그다음 일주일이 너무 달랐다. 무기한으로 연기된 개강, 적대적인 시선과 폭력적인 말과 행동들, 그리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베를린에 간지 3주도 안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선택지를 택했다. 그 선택에는 물론 후회가 없지만, 베를린에 미련이 죽죽 남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 학기에 다시 교환학생을 지원했지만 그 또한 코로나를 이유로 파견이 취소되었다. 코로나가 얼마나 지속될지,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 아무런 확신도 없는 상황에다 동기들과 또래 친구들은 취업 준비에 몰두하는 상황이었다. 단념하는 방법 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베를린이 자꾸 생각났다. 지인들은 정말 지겨웠겠지만 미련을 참 자주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이제야 모두 지나온 일이기에 쉬이 꺼내어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교환학생, 유럽, 베를린과 같은 단어만 들어도 어쩐지 억울하고 슬퍼졌다.
계속 그렇게 열등감과 미련을 가지고 살 순 없었다.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진 않다는 지인의 말을 들은 날의 새벽을 가득 채운 건 나도 가고 싶다는 아주 명확한 생각이었다. 졸업을 미루고 추가학기를 해서라도, 또 다른 변수가 생기더라도 다시 가기로 결심했다. 고민과 미련은 길었지만 결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었고 다행히 이번에는 파견이 가능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일 년을 투자할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후회할 순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답이었다.
물론 가기 직전까지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꽉 차있는 비자 예약 창을 한 달 동안 새로고침했고, 기숙사 배정이 누락되어 학교, 기숙사 담당자와 메일로 씨름하고,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러시아 전쟁을 이유로 비행기는 취소됐다. 이번엔 어떤 이유로든 돌아오지 말고 6개월 동안 잘 버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돌아오게 되면 어떡하지, 또 취소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경험했던 좌절과 불안은 (급히 다시 예약했던) 비행기를 타는 날까지도 이어졌다. 2년 만에 돌아온 브란덴부르크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온 버디와 기숙사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얼떨떨했다. 언제고 다시 한국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베를린을 다시 오기만을 바랐고, 혹시나 또 실망하게 될까 봐 아무런 계획도 안 하고 와서 그런지 막상 도착하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재작년에 인종차별만 실컷 당하다 쫓겨나듯 도망친 기억 때문인지 길을 다니는 것도 조금 조심스럽고 겁먹은 상태였다.
그랬다가 베를린 여성의 날 시위에 갔다. 베를린에 다시 오고 처음으로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고 행복하고 자유로웠다. 내가 그렇게 베를린에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유럽에서 가장 퀴어하다는 도시 베를린에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페미니스트인 것이, 퀴어인 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건 어떤 기분일까? 물론 베를린도 여러 문제를 떠안고 있고, 당장 나는 인종차별의 피해자였고, 이방인의 눈으로 짧게 머무른 도시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고, 경찰이 오고 야유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과 창문을 통해 구경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평생을 살아온 한국을 벗어나 도착한 이 도시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 진짜 베를린에 왔구나!"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