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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Jun 06. 2018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보는 세상

먼 북소리 遠い太鼓

아는 만큼 보이는 건 사실이다.

여행자에게 들려주는 격언 같은 이 말은 세상 모든 것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행지에 대해 알지 못해도 자신만의 시각을 갖는 건 가능하다.

가능할 뿐 아니라 자신만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이 때로는 더 깊이 있고 진실되기도 하다.

물론 자신만의 시각이라는 게 편견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건 세상을 깊고 세세히 관찰하는 과학자의 눈과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작가의 시각에 더 가깝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초기에 몇 편의 작품으로 상을 받자 일본 문단에서는 이상한 비판이 들려왔다. '하루키의 작품은 문학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문장으로 대변되는 이 비판에 하루키는 대응하지 않았다. 하루키의 첫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대해 '이런 건 나도 쓰겠다'라는 그들의 비판에 단지 '그들은 쓰지 않았고 나는 이렇게 썼다'라고 했을뿐이다.

사실 전통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루키의 작품은 보통 소설과는 확실히 다르다. 특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같은 작품들은 순문학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무슨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후의 작품들처럼 환상을 통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소설이라고 하면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성격을 통해 작품을 그려내고, 그렇게 작가가 바라보는 인간상이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인물이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해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가 펼쳐지고 독자들은 주인공과 동화되어 그 시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물의 시대가 지나고 내면(의식) 또는 환상의 시대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소위 문제작을 쓰는 작가였던 셈이다.


단편이나 장편 모두 한결같이 자신의 시각과 문체, 그리고 인물보다 내면에 집중된 독특한 틀을 사용해서 작품을 쓴다. 

그런 하루키가 여행기를 썼다. 당연히 그 여행기는 보통의 여행기일 수 없다. 하루키가 썼기 때문이다. 하루키 스타일의 문체와 시각으로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이 재미있는 건, 여러 가지 요소가 많지만, 심각하기 그지없는 상황과 흐름을 가볍게 그려내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이 다른 요소들보다 훨씬 강력한 점이라고 생각되는 건, 이게 독자들로 하여금 '제대로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심오하고 숭고한 주제라고 해도 독자의 입장에서 인물에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동화되고 나면 작가가 바라보는 수준에서 세상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적당한 거리에서 상황과 인물을 볼 때, 바로 작가와 같은 위치에서 보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런 하루키의 문체로 쓰여진 여행기를 보면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시각에서 본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먼 북소리遠い太鼓는 그런 이유로 재미있다. 더구나 하루키 팬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하루키식의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가벼우면서도 통찰력 넘치는 문장과 함께할 수 있으니까.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가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유명한 신전이나 영화 맘마미아에 나오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정경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하루키가 만난 사람들과 그들로부터 읽을 수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체취가 등장한다. 이 소박하고 특별할 것 없는 소재가 이상하리만치 재미있다.


이미 3번 이상을 읽었음에도 손이 가는 책이다. 


가끔 독서와 독서 사이의 틈에서 책을 읽는 휴식이 필요할 때, 

한동안 독서를 하지 못하다가 느닷없이 책이 읽고 싶어질 때,

살아가는 일들과 스트레스 가득한 내면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순간에,

먼 북소리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책의 도입부에 하루키는 피폐疲弊에 대해 서술한다. 그리고 이 책을 쓰는 동안 2권의 장편을 유럽에서 탈고한다. 마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처럼, 피폐는 그 기간을 함께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피폐한 상태에 머물러있는 지금, 나도 먼 북소리에 이끌려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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