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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Jan 15. 2016

그때는 몰랐던 가치,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남몰래 흐르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

오래전 일이다.

값이 싸서 산 CD에 모르는 이름이 잔뜩 들어 있었다. 국산 레이블도 아니고 유명 레이블은 더욱 아니었다.


음질은 최악이었다. 대부분이 모노Mono로 녹음된, 1950년대 이전의 레코딩이었다. 그래도 귀에 익은 노래가 몇 곡 있어서 끝까지 듣기는 했다.


하지만 선명하고 화려한 스테레오 음질에 익숙한 귀로 그런 음악을 듣는 건 쉽지 않았다.


한 번을 듣고 어딘가 던져놓았다.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고,

이삿짐을 정리하다 구석에서 발견한 그 CD는 여전히 낯설었다.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베니아미노 질리Beniamino Gigli,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 같은 유명 성악가의 이름이 보였다.


그때는 몰랐던 대가들의 이름.


그 이름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다시 한 번 CD를 틀어봤다.


노이즈가 심하게 들린다. 오케스트라는 장난감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다.


앉아서 몇 곡을 듣고 다시 이삿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삿짐 정리용 배경음악으로는 왠지 이상한,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 시작되었다.


이 오페라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의 주인공 네모리노Nemorino 짝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몰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은 네모리노가 이 노래를 부른다.


바순Bassoon 솔로의 긴 전주가 끝나고 아리아의 첫음절이 시작되자, 나는 감각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유명한 곡은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가수는 없었다.


Una furtiva lagrima negli occhi suoi spunto

그녀의 눈에서 남몰래 흐르는 한 줄기 눈물


기존에 들어왔던 여린 P와는 완전히 다른,

그야말로 슬픈 숨결처럼 가녀리게 흘러나오는 PPP였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 /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마치 여자가 노래하듯, 가볍고 부드럽게, 가늘고 여린 목소리로 시작하는 페루치오 탈리아비니Ferruccio Tagliavini의 이 연주를 듣고, 또 듣고, 계속 듣다 보면, 다른 연주를 듣기가 어려워진다.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도 훌륭하지만, 비야손Rorando Villazon도 탁월하지만, 탈리아비니와 연속해서 들어보면 스테레오로 잘 녹음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사라지고 마는 느낌이다.

영화 '물망초'의 한국 포스터

탈리아비니는 우리나라에는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58년에 만들어진 이탈리아 영화 물망초Vento Di Primavera를 통해 그의 목소리는 많이 소개되었다. 이 영화에는 그가 직접 출연했으며 '물망초'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가곡 'Non ti scordar di me'는 그의 목소리다.

'Non ti scordar di me'의 독일어 버전 'Vergiss Mein Nicht' / 탈리아비니

어릴 때는 알 수 없었던 가치가 있다.

물론 나이 하고는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건 일종의 안목같은 거다.


어찌 보면 낡았지만, 알고 보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장인의 솜씨로 만든 골동품처럼, 새것과 화려함에 익숙한 사람에겐 잘 구별하기 어려운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노래일 수도, 사람일 수도, 생활일 수도,


혹은 인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페루치오 탈리아비니(Ferruccio Tagliav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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