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zing Matilda / Swingle singers
인간이 자리를 잡고 사는 세상 곳곳에 민요가 있다. 또 민요는 아니지만 마치 민요 같은 노래가 존재한다.
둘의 차이점 : 진짜 민요는 수백 년에 걸쳐 구전되어 온 노래지만 민요 같은 노래는 그런 공감과 숙성 및 공유의 과정이 없다는 점이다.
공통점 : 묘하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민족과 문화와 지역 등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의 민요를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민요는 대체로 그 가사가 무척 모호하다는 점이다. 긴 세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불리고 전달되었기 때문에 생긴 이 모호성은 가사를 가사의 수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특성이 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을 예로 보면,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실연한 주인공이 그 대상을 향해 부르는 내용인데, 정작 그런 실연의 아픔을 정확하게 느끼며 노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실연과는 관계없는, 아리랑이 가진 깊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호주 민요 Waltzing Matilda 역시 그런 모호함을 입고 있다. 처음 이 노래를 듣는다면 아마도 '춤추는 마틸다에 대한 즐거운 기억' 정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호주식 사투리로 쓰인 이 노래는 놀라운 반전을 가지고 있다.
즐거운 떠돌이swagman 한 사람이 작은 호숫가bilabong
유칼립투스 나무coolibah tree 그늘에서 잠을 자게 됐다.
깡통billy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며 노래를 불렀다.
나와 함께 봇짐matilda을 지고 유랑을 가자고
양jumbuck 한 마리가 물을 마시러 호숫가로 내려왔다.
떠돌이는 기뻐서 펄쩍 뛰고 신나서 양을 잡았다.
음식 자루tucker bag에 양을 집어넣으면서 노래했다.
나와 함께 봇짐matilda을 지고 유랑을 가자고
땅 주인이라는 작자가 순종 말을 타고 나타났다.
하나, 둘, 셋, 세 명의 기마경찰도 납시었다.
"당신 음식 자루에 든 건 누구 양이지?"
떠돌이는 펄쩍 뛰더니, 호수에 몸을 던졌다.
"산채로는 절대 나를 잡지 못해!" 떠돌이가 말했다.
그 호숫가를 지날 때 그 떠돌이 영혼의 소리를 들을지 몰라
비극적인 결말의 이 노래가 1977년 호주의 새로운 국가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설마, 가사를 그대로 쓰자는 건 아니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아리랑 정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처절한 이야기를, 그들 호주 사람들은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얘기다.
민요는 그런 거다.
어쩌면 음악이 그런 건지도 모른다.
모호함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민요를 사랑하게 만든다.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신비의 요소가 유머러스하게 담긴 이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들으며 비극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냥,
저 깊은 곳에서, 역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모양을 한 신비로운 미소가 슬며시 떠오른다.
그게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민요의 힘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