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좋아하는 선생님이요?

에픽하이, 크러쉬, 데이식스에서 데이식스 팬임을 인정하기까지

by 손톱달

아이들과 스스럼 없이 소통하는 친구같은 교사를 지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권위를 위해서 '일코'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일코란, 일반인 코스프레의 준말로 어떤 연예인의 팬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척 하는 것을 뜻한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신규 교사로 발령받은 때의 내 나이는 26살.

중학교 1학년을 맡아 가르쳤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불과 몇달 전 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에서의 '최고 학년'으로서 형님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리고, 귀엽고, 순진무구하다.

선생님에 대한 관심도 엄청나서 (중학교 2학년, 3학년이 되면 사그라드는 특징이지만) 끊어내지 않으면 자꾸tmi 남발을 유도한다.


"선생님 몇살이에요?"

"선생님 남자친구 있어요?"

와 같은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서부터

"선생님 옷 어디서 사세요?"

와 같은 대체 왜 물어보는걸까 싶은 질문까지.. 그 범주는 다양하다.


대부분의 질문이 대답하기 난감하지만 나를 제일 난감하게 했던 질문이 있었으니

"선생님 가수 누구 좋아하세요?" 였다.


나는 마이데이(데이식스 팬덤 명)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기에 갑자기 입덕하게 되어 수험 기간 동안 노래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준 그룹.

그래서 더욱 더 고맙고도 애착이 가는 가수.


그러나 나는 학생의 질문에 한참을 답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이걸 말해 말아...?'

마이데이라고 밝혀버리면... 나의 팬심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그리고..그렇게 되면...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음..선생님은 에픽하이랑 크러쉬랑...데이식스?"라고 말했다.


DoKnASlUYAArKIB.jpg 악뮤, 박효신, 아이유, nct127로 유명한 밈

인터넷에서 본 위 밈(meme)같이.

내가 말한 가수들 중 데이식스를 향한 내 마음이 가장 크다는 것이 티나지 않기를 바라며.


"아하? 저 에픽하이 알아요!"

휴, 다행히다. 자연스러웠어.

우려와 달리 데이식스에 대한 꼬리질문은 없었고.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렇게 현재. 다시 1학년을 가르치고 있는 내가 있다.

지금의 아이들은 내가 마이데이인걸 안다.

"선생님 저 어제 티비에서 영케이 봤어요!"

먼저 데이식스 봤다고, 데이식스 노래를 들었다고 나에게 와서 알려준다.

며칠 전에는 이런 팬아트(?)도 받았다.

KakaoTalk_20241022_104255750.jpg 내이름 하트 데이식스.. 감개무량하다..


몇년 새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나는 내려놓는 법을 많이 배웠다.

내가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콘서트에 많이 다닌다고 해서 아이들은 나를 '쉽게'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인과 나의 공통점을 찾아내곤 기뻐하며 내 tmi로부터 본인들의 tmi를 꺼내놓는다.

그리고 뭐 좀 쉬워보이면 어때?

아이들이 '쉬워 하는'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 나이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기쁨이리라.

고작 좋아하는 가수를 밝히는 것과 나의 교사로서의 권위를 연결지을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신규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얼마전에 또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가수 누구 좋아하세요?"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쌤? 쌤은 데이식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