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틸이 반지의 제왕을 전략으로 쓰는 방식

신화를 전략으로 쓰는 방법

by quende

처음 팔란티어(Palantir)라는 회사 이름을 들은 건 작년쯤이었다. 요즘 최고로 핫한 미국주식 종목 중 하나라고. 그래서 검색했다. 회사 로고를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영화에 나오는 팔란티르


아 이거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그거!


J.R.R. 톨킨이 평생에 걸쳐 집필한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이 속한 가운데땅(중간계, middle-earth)의 신화 '레젠다리움'. 팔란티르(팔란티어, Palantir)는 그 세계에 등장하는 '보는 돌'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게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데이터 분석 기업의 이름이었다.


여기까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좀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하나의 이름이 아닌 이름의 패턴을, 그리고 그 패턴의 중심에 있는 한 사람을.


패턴이란 뭘 말하는고 하니, 안두릴(Anduril) 테크놀로지스, 에레보르(Erebor) 뱅크라는 둥, 찾아볼수록 미국에서 요즘 뜨거운 감자인 기업들 - 방산, 금융, 벤처 - 이름이 레젠다리움 원전에서 온 것들이 많더란 것이다.


나는 톨킨의 흔적을 찾아 옥스퍼드 여행을 다녀왔을 정도로 열심인 톨키니스트인지라, 갑자기 미국에 레젠다리움의 바람이 분 경위와 그 중심에 있는 피터 틸(Peter Thiel)이라는 사람에 대해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다.



Peter Thiel — 반지의 제왕을 열 번 넘게 읽은 자


피터 틸(좌)과 일론 머스크(우)


피터 틸은 페이팔의 공동창업자이자, 페이스북 최초 외부 투자자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론 머스크 짱친(애증?)이라고 하면 쉽게 와닿을 것 같다. 파운더스 펀드(Founders Fund)를 통해 스페이스 X, 오픈 AI 등에 초기투자했으며, 투자활동이 주가 되기 때문에 영향력 대비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미국 테크·방산·정치 전반에 걸쳐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톨키니스트다. 성인이 된 후에도 반지의 제왕을 열 번 이상 읽었다고 직접 밝혔다. 2023년 The Atlantic 인터뷰에서 틸은 톨킨 세계관 속 엘프 — 죽지 않는 존재 — 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우리는 엘프가 될 수 없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그건 문학적 감상이 아니라, 수명 연장 기술에 수억 달러를 쏟아붓는 사람의 진심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레젠다리움에 원전을 둔 수많은 기업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팬심만은 아니라 보인다. 이미 수 억 명의 뇌에 각인된 상징체계를 가져다가 기업 정체성에 덧씌우면 설명 없이 전달되는 비전이란 것이 생긴다. 팔란티어라는 이름 하나로 그 기업이 무엇을 하려는지, 어떤 자의식으로 움직이는지 순식간에 박힌다.



이 레전다리움 네이밍의 중심에 틸이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라 패턴이다. 그리고 그 패턴은 개별 기업의 이름을 뜯어봤을 때 비로소 윤곽이 드러난다.




Palantir - 우리는 도구입니다.


팔란티어가 서비스하는 고담의 화면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는 2003년 설립된 빅데이터 분석 기업이다. 데이터 감시, 분석 플랫폼을 납품하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이런 서비스다.


테러범의 통화기록, 계좌이체, 이동경로를 한 화면에 깔아놓으니까 누구랑 엮여있는지 한눈에 보이네. 거기서 아직 수사선상에 없던 A라는 인물이 계속 걸리는 걸 보니 이쪽을 더 조사해 봐야겠군!


가운데땅에서의 팔란티르는 요정어로 '넓게, 멀리 보는 것' 정도의 뜻이며, 구체 형태의 돌이다. 들여다보면 멀리 있는 사람이나 사건을 볼 수 있으며, 여러 개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의 팔란티르를 통해 소통할 수도 있다. 예로부터 국경의 감시와 같은 쓰임새로 사용되었다.


데이터 감시 플랫폼이 '멀리 보는 돌'을 이름으로 달았다는 건, 자기 정체성을 꽤 솔직하게 드러낸 작명이다. "우리는 도구입니다. 들여다보는 건 당신이고, 판단하는 것도 당신입니다." 그래서 이 기업이 어떤 일에 협력하든 — 정보기관이든 국경 감시든 — 직접 책임을 묻기가 묘하게 무력해진다. 책임 분산 구조를 이름 자체에 내장한 것이다.


팔란티르를 손에 쥔 페레그린


여기서 생각을 한 번 더 밀어보자면, 원전에서 이 팔란티르는 중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누군가(사우론)가 돌 너머에서 뭘 보여줄지 선별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이들(데네소르, 사루만)의 생각은 틀어졌다. 팔란티어가 지금 당장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게 무서운 지점이 아닐까?



"들여다보는 건 당신이고, 판단하는 것도 당신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보여줄지는 우리가 정합니다."





Anduril - 그래서 당신네들이 아라곤이라는 건가요


안두릴 인더스트리즈는 2017년 설립된 방산 스타트업이다. 자율무기, AI기반 국경 감시 시스템을 만드는 곳이며, 최근 Open AI랑 협업한다는 소식이나, 상장 계획 등이 밝혀지며 한국 내에서도 인지도가 급격하게 올랐다.



부러졌던 왕의 검 '나르실'


'안두릴'은 부러졌던 왕의 검 '나르실'이 재단조되며 붙은 이름이다. 원전에서 이 검이 다시 벼려진 건, 단순히 좋은 무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아라곤 — 인간 왕가의 정통한 후계자 — 이 어둠에 맞서 인간의 시대를 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안두릴은 무기이기 이전에 정당성의 상징이다. 영화를 봤다면 아라곤이 검을 받아 드는 장면(확장판)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 검을 쥘 수 있는 건 혈통과 자격을 갖춘 한 사람뿐이다.



새롭게 벼려진 안두릴


그렇다 보니 이 이름은 톨키니스트 입장에서 다소 속이 보이는 네이밍이다. 팔란티어가 자신들은 '도구'라며 한 발 물러설 때 안두릴은 '우리는 정당한 싸움을 위한 검이다'라고 정면 선언한다.


그리고 이 '정당한 검'의 서사는 실제로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 안두릴의 공식 미션 문서 제목은 "Rebooting the Arsenal of Democracy —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재건하다."인데, 이 문구 자체는 루스벨트의 연설에서 따온 것이지만, 구형 방산 카르텔이 녹슬었으니 우리가 새로운 검을 벼려내겠다는 선언의 구도는, 부러진 나르실을 재단조해 새 시대를 여는 안두릴의 원전 서사와 어느 정도 겹쳐 읽힌다.


하지만 원전에서 안두릴이 정당성을 갖는 건, 검 자체의 힘 때문이 아니라 쥔 손의 자격 때문이다. 아라곤의 혈통과 자격이 없다면, 안두릴은 그냥 잘 만든 검일뿐이다. 방산기업이 이런 자기 서사를 이름에 박아 넣었을 때, 쥔 손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긴 어렵게 된다. — 그 이름에 박힌 '정당성'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그 눈


안두릴이 미국-멕시코 국경에 설치한 AI 감시 타워에 대해 미국 세관당국은 공식 웹사이트에서 소개하길, '절대 졸지도 눈 깜빡이지도 않는 파트너(that never sleep or blink.)'라고 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감시자 — 그건 사우론의 눈이다. '정당한 검'을 자처하는 기업의 제품이 '어둠의 눈'으로 비유되는 순간, 이름에 박힌 정당성은 흔들린다.




The Precious - 골룸! 골룸!


피터 틸의 생태계는 두 회사에서 멈추지 않는다.

Capital&Main - Right-Wing Rings of Power


발라 벤처스(Valar Ventures) — 발라는 가운데땅을 빚은 절대 존재들이다. 위에서 내려와 세상을 만든 신들의 이름을 초기 단계 벤처캐피털에 붙였다.

미스릴 캐피털(Mithril Capital) — 미스릴은 가볍지만 어떤 칼날에도 뚫리지 않는 요정 금속이다. 성장 단계 투자 펀드가 '보호하면서 변형시키는 금속'을 자처한다.

에레보르(Erebor) — 난쟁이들이 황금을 쌓아두던 외로운 산. 크립토·AI·방산 스타트업 전문 은행의 이름이 되었다.

리벤델 원(Rivendell One), 렘바스(Lembas) — 엘프의 은신처와 여행 양식. 틸의 자산 이동용 지주회사들이다. 자산을 모았다 흘려보내는 구조물에, 쉼터와 양식의 이름을 붙였다.


The Precious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위에 있는 파운더스 펀드(Founders Fund). 틸의 내부 측근들이 이 펀드를 부르는 별명이 있다. "the Precious." 골룸이 절대반지를 부르던 그 말이다. (출처는 The Generalist의 파운더스 펀드 심층 시리즈다.)


이건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톨킨의 세계에서 절대반지는 모든 반지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을 가진 자를 예외 없이 부패시키는 물건이다. 그걸 알면서 자기 펀드를 그렇게 부른다. 반지가 어떤 결말로 향하는 물건인지를 알면서.




Legendarium — 상징을 설계도로


톨킨은 절대반지가 소유자를 부패시키고, 팔란티르가 들여다보는 자를 오염시키며, 에레보르의 황금이 지키는 자를 망가뜨리는 구도를 썼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구조적 통찰이었다. 경고였다.


그리고 레전다리움의 이름들은 그 구도 위에 세워진 기업들에게, 직원들에게 세계관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는 그냥 문학적으로 번지르르하다거나, 톨킨 덕후 직원들을 동기부여한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정태영 CEO가 소개하는 현대카드의 전략 보드


기업을 운영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모두의 머리에 같은 그림을 심고, 같은 판단 구조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지. 피터 틸은 그걸 기업 네이밍으로 한 번에 해결해 버렸다. 직원 개개인이 그 자의식을 선명하게 느끼든, 그렇지 못하든 — 이름 아래 깔린 세계관이 전략으로 번역되어 내려오는 순간, 그 자의식은 이미 조직 안에서 작동하게 된다. 기업의 네이밍이 그 자체로 조직 전체의 판단 구조에 박히는 비전적 앵커로 작동한다. 그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수많은 전략적 선택들이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나온다.


틸이 이 구조 전체를 내다보고 이름을 지었는지 —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다. 하지만 의도했든 아니든, 구조가 작동하면 설계와 같다.




마무리하며


많은 톨키니스트들이 이 상황에 불쾌감을 표한다는 걸 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톨킨이 설계한 구도에서, 절대반지를 쥔 자는 패배한다. 그걸 쥔 채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자 — 사우론이든 사루만이든 보로미르든 — 는 예외 없이 무너졌다. 반지는 파괴되어야 했고, 그걸 파괴한 건 권력을 원하지 않았던 호빗이었다. 이것이 톨킨이 평생에 걸쳐 쓴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런데 틸의 측근들은 자기 펀드를 "the Precious"라고 부른다. 그 사실을 알면서. 그게 어떤 결말로 향하는 이름인지를 알면서.


물론 반지의 제왕은 픽션이고, 반지를 쥔 자는 결국 무너진다는 법칙이 현실에서 작동할지는 모를 일이다. 틸은 그 법칙의 바깥에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 수억 명의 뇌에 박힌 신화를, 자기 사업의 설계도로 쓰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레전다리움이 현실에서 가장 기이하게 작동하는 순간이다. 물론 혹자는 그냥 톨킨 덕후가 회사 이름을 덕력 충만하게 썼을 뿐이지, 과대해석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네이밍이 전략적 파워를 갖게 된 순간 분석의 가치는 생긴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