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를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정희원 사태와 무너진 이상적 주체의 얼굴

by 라캉트

1. 투자자로서의 애도: 나는 왜 흔들리는가

이 글의 첫 문장은 정희원이 아니라 ‘나’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정희원을 꽤 오래, 그리고 진지하게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의 유튜브를 구독하고, 그의 저서를 탐독하며, 그의 X(트위터) 타임라인을 종종 확인했다. 그가 말하는 ‘저속 노화’의 방법론뿐 아니라,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하나의 레퍼런스로 삼았다.

난 그의 SNS 유머를 좋아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그의 단순한 ‘팬’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에게 정서와 상상력을 맡긴 ‘투자자’에 가까웠다. 그는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러닝으로 다져진 몸, 교양, 가족, 전문성, 그리고 SNS 감각까지 — 우리가 도달하고 싶었던 이상적 주체의 패키지였다.


우리는 그에게 돈이 아니라, 우리가 되고 싶었던 삶의 형상을 투사했다. 그래서 지금의 충격은 단순히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믿고 싶었던 그 모델 자체가 허구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2. 권위를 가지되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환상

정희원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공식 석상의 엘리트 언어와 SNS의 유연한 언어 사이의 매혹적인 틈이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권위를 가지되, 전혀 권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갈망한다. 위계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우리와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 정희원은 이 갈증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우리는 그를 보며 믿고 싶어 했다.

저 사람은 높은 곳에 있지만 우리와 같은 편이다.


그러나 지금 제기되는 의혹들은, 우리가 사랑했던 그 따뜻한 문장과 섬세한 어조가 그의 몸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닐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대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격의 위임’ 문제다.


우리가 신뢰했던 ‘정희원’이라는 인격이 사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 위에 세워진 캐릭터였다면, 우리가 믿었던 대상은 과연 누구였을까.


3. 베일 뒤에서 드러난 ‘주인’의 얼굴

최근 공개된 비평과 증언들 중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실제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를 권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인물로 기억한다는 점이다. 이 증언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기 때문이다.

SNS 학력비하 논란

우리는 그를 위계에 저항하는 합리적 전문가로 소비했다. 그러나 현실의 그는 위계의 중심에서 그 힘을 휘두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급자인 연구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학문적 성과는 자신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기만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던 ‘꼰대’와 ‘권위주의’가, 가장 세련된 언어와 이미지로 포장된 채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 그것은 우리 자신의 안목을 되묻게 만든다.


4. 논문과 목소리 사이의 갭: 연루된 자의 통증

왜 이 사건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개인적인 모욕처럼 느껴질까. 나 역시 논문 속의 정제된 자아와, 일상에서 말하는 나 사이의 갭을 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간극을 위선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맥락 감각으로 이해해 왔다. 그래서 정희원에게서도 비슷한 고군분투를 읽어냈다.

그런데 그 갭이 사실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해 만든 캐릭터의 연출이었다면, 나의 동질감은 배신감으로 바뀐다. 그가 보여준 매끈한 삶의 궤적이 누군가의 시간을 연료로 태워 만든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그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 그와 닮고 싶어 했던 나 자신의 지향까지 함께 무너뜨린다.


5. 설계된 신뢰와 무너진 모델

이 사건의 핵심은 성추문이나 돈이 아니다. 본질은 “우리는 어떤 사람을 신뢰하도록 설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정희원은 플랫폼 자본주의와 미디어가 요구하는 ‘이상적 전문가’ 모델의 최전선에 있었다. 2,900만 원짜리 패키지여행과 햇반 협업 사이를 오가며 “건강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모순적인 설득력. 지금 무너진 것은 한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공들여 만들어온 ‘똑똑하고 다정한 전문가’라는 환상이다.


6. 미움이 아닌 애도를 위하여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미움은 여전히 그에게 에너지를 쏟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내가 믿고 싶어 했던 세계를 애도한다.


그가 보여준 삶은 너무 완벽해서, 우리로 하여금 “저렇게 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찰나의 희망을 품게 했다. 그 환상이 무너졌을 때 남는 것은 분노보다 슬픔이다. 타인의 노동을 연료로 태워 올린 로켓이 추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목격자의 슬픔.


로켓은 연료를 태우고, 환상은 언젠가 깨진다.


이제 우리는 가면이 아니라, 그 아래 놓인 구체적인 노동과 비루한 현실을 보아야 할 시간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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