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 전용 영화〈나 홀로 집에〉의 정신분석
이 글은 농담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농담은 언제나 가장 먼저 진실을 말한다. 프로이트가 그랬듯, 농담은 억압된 욕망이 검열을 피해 의식의 표면으로 분출되는 가장 우아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 홀로 집에〉는 아이를 위한 영화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열광한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 '집단적 퇴행'에 동참한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케빈은 승리하고, 도둑은 파멸하며, 가족은 회복된다. 그럼에도 이 반복되는 재생 버튼을 누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홀로 집에〉의 설정은 단순하다. 부모가 사라진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대타자(Other)'의 일시적 실종이다. 집안의 질서를 유지하던 법과 금지가 사라진 순간, 케빈은 결핍에 빠지는 대신 해방을 맞이한다.
케빈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집을 점령하고 자신만의 법을 세운다. 부모의 부재는 위기가 아니라 '전능 판타지'가 개시되는 필수 조건이다. 케빈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잠시 신이 된 것에 불과하다. 부모가 없는 집에서 케빈의 욕망은 더 이상 타자의 욕망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기이한 지점은 폭력이 전혀 윤리적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리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불에 타며, 감전되고 추락한다. 스크린 너머의 우리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박장대소한다.
왜일까? 이 폭력은 어른에게 가해지는 아이의 복수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권력관계의 역전이 허용되는 유일한 상징적 유예 기간이다.
도둑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케빈(혹은 우리)의 내면에 거주하던 '처벌하는 권위'가 투사된 대상일 뿐이다. 그들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묘한 쾌락, 즉 주이상스를 느낀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금기는 폭력이 아니라, '부모의 귀환' 그 자체다.
영화 속 집은 따뜻한 안식처가 아니다. 케빈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편집증적 요새다.
케빈은 집 안의 모든 동선을 파악하고 함정을 설계하며 침입자를 처리한다. 여기서 집은 보호의 공간이 아니라 지배의 공간으로 전도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은근히 불편해진다. 원래 집이란 부모의 권위가 작동하는 장소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거세된 집에서 아이는 주체가 된다. 그러나 그 주체성은 성숙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라는 마법이 허락한 일시적 독재에 가깝다.
크리스마스는 이상한 계절이다. 용서가 남발되고, 퇴행이 미화되며, 모든 불편한 질문이 유예된다.
〈나 홀로 집에〉는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환상이다. 영화는 속삭인다.
"걱정 마, 잠깐은 부모가 없어도 돼. 잠깐은 네가 세상을 다스려도 괜찮아."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전능감은 유통기한이 짧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매년 이 영화를 반복한다. 한 번의 전능함으로는 현실의 결핍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건 단지 추억 때문이 아니다.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안다. 부모 없는 집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연료'가 되어야만 이 시스템이 돌아간다는 것을.
그럼에도 재생 버튼을 누르는 건, 한 번쯤은 다시 아무도 없는 집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해보고 싶은 은밀한 소망 때문이다.
〈나 홀로 집에〉는 가족 영화가 아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허락되는 집단적 퇴행의 제의(Ritual)다. 우리는 이 영화를 농담처럼 소비하지만, 화면이 꺼진 자리에서 조금 씁쓸해진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농담이라고 부른다.
농담으로 만들어야만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