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가 호출한 것
나는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단종이 어떻게 죽는지, 엄흥도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역사를 모르더라도 영화의 구조가 처음부터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살아남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 극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울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미 아는 결말 앞에서 울었을까. 그리고 왜 1,500만 명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타이밍에 울었을까.
극장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웃음이 나오는 장면에서 다 같이 웃었고, 감정이 쌓이는 장면에서는 객석 전체가 조심스러워졌다.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요함. 엄흥도가 단종 곁에 남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누군가 먼저 훌쩍였고, 그 소리가 옆 사람에게, 또 그 옆 사람에게 번져갔다. 일종의 집단 호흡 같은 것이었다.
이건 내가 영화에 감동받았던 여타의 순간들과는 달랐다. 영화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를 건드렸을 때의 전율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정확히 울어야 할 타이밍에, 설계된 자리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나고 며칠 뒤, 지도 앱에서 기묘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세조의 능인 광릉에 누군가 리뷰를 남기고 있었다. "영원히 벌 받아라", "두고 볼 거야." 반대로 단종의 묘 장릉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이번 생엔 행복하게 지내", "오빠 보고 싶어." 600년 전 인물에게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과몰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건 과몰입이 아니다. 감정이 텍스트 밖으로 넘쳐흐른 상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감정이 멈추지 않고 제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수행한 역할은 사실 단순하다. 역사를 재현한 게 아니라, 역사를 감정으로 번역했다. 계유정난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보호하지 못한 자'와 '보호받아야 할 자'의 관계성만 남았다. 권력의 문제는 소거되고,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비극이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이 구조는 사실 아주 고전적이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지키는 자와 지켜지는 자. 그런데 이 영화가 지금 이 시점에 도착했을 때, 관객들은 이미 '무언가'를 가득 채운 채 극장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각자의 내면에 억눌린 분노, 어딘가 보호받고 싶은 갈망, 혹은 무언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 같은 것들을 품고 들어온다. 영화는 그 감정을 새로 창조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을 투사할 '안전한 대상'을 제공했을 뿐이다.
단종은 보호의 대상이 되었고, 세조(또는 한명회)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감정은 이미 존재했고, 영화는 그것이 흘러갈 물길을 터주었다. 그래서 극장은 예술적 감동의 공간이 아니라 정서적 배출의 공간이 되었다. 마음 놓고 울어도 안전한 곳, 정당하게 분노해도 괜찮은 곳 말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욕망은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감정을 쏘아 보내야 한다. 현실에서 그 대상을 찾지 못할 때, 혹은 대상이 너무 거대해 감당할 수 없을 때, 감정은 우회로를 찾는다. 지금 사람들이 600년 전 왕의 무덤에 댓글을 남기는 행위는 그 지독한 갈증의 끝단이다.
세조에게 비난을 남긴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 옛날의 수양대군을 증오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들은 현실에서 처리하지 못한 울분을 그곳에 붙인 것이다. 안전하게 분노할 수 있는 대상, 이미 죽어서 결코 반박할 수 없는 존재에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왜 울었는가.
단종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역사적 비극에 새삼 감화된 것도 아니었다. 울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타이밍에, 이미 울 준비가 된 상태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내 감정을 만든 게 아니라, 내 감정이 영화라는 출구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이 영화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울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울었다.
1,500만 명이 비슷한 이유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감동을 수확하러 간 것이 아니라, 고여 있던 감정을 흘려보낼 하수구를 찾아서.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다. 울어도 되는 정당한 명분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천만'이라는 숫자에 도달한 실질적인 이유다. 또한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지금 우리 사회의 결핍과 상태를 가장 정직하게 증명하는 텍스트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