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 돋은 퇴근길

야금야금 먹어치우다

by 생각하는냥

퇴근길, 심술이 돋는다.


마나님은 조카랑 논다고 강아지까지 데리고 마실을 나가셨고

집에 가면 혼밥이라 식당에 들리려는데 딱히 메뉴가 떠오르지 않는다.


폰을 꺼내 지인과의 수다를 할라치니 마침 통화 중이다.

통화 중 전화가 왔다는 걸 알 텐데도 지인은 연락이 없다.

썩을 놈. 아웃이다.


행여 심심할까 이어폰을 꽂고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 라디오를 듣는다.

안양천 길에 다다르니 어둑어둑해진 가운데 빼곡히 가득한 가로수 나뭇잎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나와 운치 있게 길을 비춘다. 옆으론 안양천이 흐르고 그 너머로는 길게 쭉 뻗은 아파트 불빛들이 반듯반듯하게 줄을 맞춰 서 있다. 멀리 보이는 젤 앞줄의 아파트가 소리 지른다.


"앞으로 나란히"


줄 맞춰 반듯반듯 나란히 선 아파트들이 오늘따라 천진난만하게 귀엽다.


천천히 터벅터벅 걸으며 가을남자 코스프레 놀이하며 가로수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칠 때마다 마치 영화의 스틸컷이 스치듯 지나간다. 건너편의 즐비한 아파트 불빛들, 그리고 그 아래로 안양천을 오가는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영화 필름을 가득 채운다. 마침 라디오 음악에 맞춰 돌아가던 필름은 마치 뮤직비디오라도 보는 듯하다.


아마 옆에서 누가 날 본다면 배꼽 잡고 웃을 수도 있다. 한껏 폼 잡고 걷는 게 내가 봐도 티 나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깜깜한 저녁이가 절묘하게 가려준다.


1966년생 이금희 누님의 곱디고운 목소리가 귀를 녹이는 사이 안양천의 뮤직비디오는 어느새 끝을 맺는다.


이어 아파트 계곡 사이의 골목길로 접어들자 사람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각자 각자가 자그마한 인생극장이다.


태권도복을 입고 집으로 귀가하는 아이들에게도 놀이터에서 아이랑 함께 노는 엄마와 동네 형아들에게도 그리고 양손 가득 채운 비닐봉지를 들고 뒤뚱거리며 분주하게 걷는 아주머니의 발걸음에도 인생은 펼쳐진다.


가게마다 뿜어내는 형광등 불빛에도 궁금하리만치 호기심 가득한 인생극장이 상영 중이다. '전체가', '15세이상가'의 수다도 뿜어져 나올 듯싶다. 가끔 '19세 이상가' 수위의 수다도 재밌을 텐데. 나도 좀 끼자.


혼자여도 외롭고 둘이어도 외롭고 여럿이서도 외로울 것 같았던 퇴근길은 일면식도 없던 타인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채워져 외로울 겨를 없이 집으로 향하게 해 준다.


입맛도 없었는데 그새 먹고 싶은 게 떠올라 먼길 돌아가 어느새 손에 쥐어든 포장음식은 외로운데 외롭지 않고 심심한데 심심치 않게 곧 입안으로 들어갈 생각에 절로 침을 고이게 한다. 빠삭빠삭한 한 입이 씹힐 때마다 삐뚤어진 심술도 야금야금 먹어치우겠지.


보잘것없었던 불금의 저녁도 야금야금 먹어치워 지겠지.


아사삭 와사삭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치약 어디서부터 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