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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Dec 01. 2023

오덕의 향기가 느껴지는 날에는 두 걸음 떨어져 걷자.

코끼리 궁둥이 두 짝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버스정류장에는 덩치 큰 사내가 서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오덕 같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덕의 진한 향기가 묻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덩치가 컸다는 것만으로 눈에 뜨였을 뿐 스쳐 지나갈 사람이었다. 버스를 같이 기다리는 정도의 딱 그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 사람이었다.


타야 할 버스가 다가오는데 그가 손을 들었다. 타는 버스가 같은 모양이었다. 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걸로 봐서는 그도 경기도 버스를 꽤 타본 듯하다. 경기도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퍼진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버스는 손을 흔들어야 선다는 공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가기 때문에 반드시 손을 흔들어야 한다고. 하긴 얼마 전에는 손을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쳐 버려서 지각을 해야만 했던 날도 있었다. 퇴근길이었으면 급똥으로 인한 심리 불안 등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을 터인데 출근길이었기에 화딱지가 머리 뚜껑을 뚫고 화산 터지듯 터졌던 날. 여기서 그만. 그날의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지는 말자. 


하여간 그가 경기도 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버스가 오자 그에게 먼저 타라고 양보하였다. 그를 따라 올라타려는데 그의 코끼리 궁둥이 두 짝이 얼굴을 덮칠 뻔하였다. 황당하였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버스를 타는 사람이 갑자기 왜 타다 말고 엉덩이를 뒤로 내뺀단 말인가. 한 걸음 사이였던지라 대형 참사가 날 뻔하였다.


아침부터 못볼꼴을 보고 나니 안구정화 및 뇌세포의 기억들을 다른 것들로 열심히 채워야만 했다. 하루 종일 보면 안 될 궁둥이로 인해 찝찝한 기분을 이어갈 순 없지 않은가. 


정화 작업을 거의 마치고 나쁜 기억을 다 잊어갈 무렵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하필이면 그때 그도 일어서는 게 아닌가. 열심히 기억세포를 다 재설정을 했는데 다시 그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하필이면.


버스가 서기 직전 카드를 찍었다. 그때 그 코끼리 궁둥이를 가진 그가 허리를 숙이는 거였다. 응 또? 뭐 하는 짓이지?


그랬다. 그의 교통카드가 목걸이 형이었던 것이다. 하필 그 목걸이가 많이 짧았고 부득이하게 허리를 숙여야만 카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카드를 찍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선이 짧은데 찍을 때마다 허리 굽히는 게 더 힘들어 보여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상대가 기분이 상해 덩치로 상대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코끼리의 큼직한 궁둥이가 새로 태어난 기억세포들에 채워져 버리고 말았다. 힘들게 정화시켰고만. 하루 종일 일만 열심히 한 이유가 코끼리 궁둥이를 잊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무도 안 믿겠지.


그래.

오덕의 향기가 느껴지는 날에는 두 걸음 떨어져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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